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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를 만나다.
    Letter from Kunner 2006. 1. 27. 06:28

    어제 쿠를 만났어.
    내가 무척 좋아하는 형인데, 지금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지.
    비자 문제로 잠시 들어 왔다가 갈거라고, 그제 밤 늦게 도착했다더군.

    어제 아침 일찍 전화가 왔었어.
    간밤에 들어 왔다고, 얼굴 보자고.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이라 너무 놀랐고 또 반가웠어.

    마지막으로 봤던게 재작년 훈련소 입소 전날이었어.
    훈련 들어가 있는 동안 출국해서 그 후로는 한번도 보지 못하고 싸이 같은 걸로 간간히 연락만 취하는 정도.
    1년 반만에 마주한 얼굴은 마치 며칠 전에 만났던 사람인것 처럼 익숙하다.
    변한게 하나도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말야.

    유학 가서 반년 만에 석사 마치고 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는데..
    원래 산타바바라에 있다가 지난 학기에 애리조나로 옮겼는데 풍토병에 걸렸다나봐.
    한번도 가 본 일 없지만, 애리조나 하면 "사막" 이 떠오르는데..
    그래서 풍토병이라는게 그리 새삼스럽게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어.
    아무튼 그 병 때문에 한 3개월을 죽다 살았다더군.
    덕분에 한 학기를 통째로 날려 먹어서, 학기를 연계 해야 하는 학과 과정 특성 상 한 학기가 아닌 1년을 쉬어야 한대.

    무척 열심이었던 그에게 큰 충격이었을거야.
    그래도 이젠 다 나아서 다시 건강해졌다니 다행이야.
    애초 예정보다 조금 미뤄지긴 했지만, 다시 건강을 찾은 일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네.

    학기 중엔 너무 바빠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다니나봐.
    영어를 꽤 잘 하는 사람인데도 불구, 수업을 따라가는 일 조차 힘겹다니 유학 생활이 그리 만만한 건 아닌가봐.
    가뜩이나 어려운 공부, 수업을 따라가기도 버거우니 남는 시간이라는게 있을 리 없겠지.
    공부, 또 공부.
    뒤쳐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는 말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워낙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니까.. 정말 열심히 하고 있다는 말이 믿음직스럽다.

    유학 생활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이라더라.
    다행히 유학 온 친구들이 좀 있어서 그네들과의 교류로 향수를 달래곤 한다는데..
    부디 그의 유학 생활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얘기 하는 중에,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너무 태만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보다 훨씬 앞서가 있다는 생각 들 때 마다 부끄러움과 부러움, 또 오기.

    하루 서너시간 자는 생활을 3년 내내 하며 병특 하는 중에 GRE를 패스하고, 
    지금도 잠 자고 밥 먹는 시간마저 아까워 하는 사람.
    수업내용을 알아 듣기조차 힘들다고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반년만에 석사 과정을 마친 사람.
    꿈을 위한 그의 노력앞에 나는 늘 부끄러워져.


    결국 다 핑계에 불과해.
    내 발목을 잡아 끄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런 것들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건..
    결국 다 핑계에 불과할 뿐야.
    그나마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면서 뭘 더 바라기만 하고 있는거야.
    그렇게 게을러서, 그렇게 무능력해서 뭘 더 갖겠다고 바라기만 하고 있는거야.
    나는 무얼 하고 있기에 이렇게 시간만 허송하고 있는게냐.

    그와 마지막으로 마주하던 날, 다시 얼굴 대할 때는 지금보다 훨씬 큰 사람이 되어 있겠다고.
    그때까지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그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모두 열심히 노력해서 다시 만날 때는 호쾌하게 웃는 일만 가득하자고.
    그렇게 약속하고 1년 반이 지났는데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네.
    그나마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는 위안도, 한살 반이나 더 먹은 나이를 생각하면 한숨으로 바뀌고.

    앞으로의 행보가 어찌 되겠느냐고.. 이제 어찌 할테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이것저것 두서없는 얘기들을 자신없게 풀어나간다.
    어떤 얘기도, 어떤 다짐도 자꾸만 깊은 한숨과 함께 잦아들어.


    돌아오는 길에 차를 한켠에 세워두고 잠시 쉬고 싶었어.
    머릿속은 온통 복잡해져 있어서 신호등도 잘 보이지 않고 자꾸만 차선이 좁게만 보이더라.
    참 좋아하는 형을 만나서 너무 반가웠는데, 온통 즐거운 마음으로 가득해야 할텐데 실제론 그렇지 않아.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딱히 나쁜 모습을 보였던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이러이러하게 살고 있다고 밝게 웃으며 말해 주지 못해 너무 안타까워.

    이번 입국은 비자 때문에 급하게 오게 된거라 금방 또 나가봐야 하고..
    6월 쯤 한달 이상 들어와 있을 거라더라.
    그때는 좀 긴 시간을 두고, 자주 또 오래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졌어.
    그때까지 그도 나도, 건강하고 바라는 일 모두 이뤄지기를.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내가 좀 더 밝아지기를..
    즐거운 사람을 만나며 온통 즐거운 마음만 가득할 수 있기를.


    무조건, 열심히 하는 수 밖에 없어 나는.
    그래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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