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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은 없다.
    Letter from Kunner 2005. 7. 30. 18:26
    어린 시절, 나는 사랑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 믿었다.
    처음 마주칠 때 부터 머리에서 종이 울려 대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 저것 따져가며 만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었다.
    사랑이란 그저 보는 순간 불꽃이 튀어야만 했던 것이다.

    순정만화를 보며 자란 것도 아닌데도, 마치 순정만화에나 나올 것 처럼 내가 그리는 사랑은 늘 그랬다.
    물론 순정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내가 큰 키와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게 올 사랑은 굳이 내가 그런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분명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천사의 종소리와 함께 꼭 나타날 거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랬던 적이 있는가?
    보는 순간 불꽃이 튀고, 눈이 멀어 버리는 그런 사람, 내 기억으로는 만나 본 일이 없다.
    낯가림이 심한 나로서는 아마 만났다 해도 어찌 할 줄을 몰랐겠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천사라도 날아와 종을 울리고 머리 속을 뒤 흔들어 놓으면 또 다르지 않았을까?


    나는 언제까지나 사춘기 청소년이 아니다.
    언젠가는 한눈에 반할 사랑이 찾아 올 거라 애써 믿고 싶으면서도
    사랑은 꼭 그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됐다.
    필요에 의해서 만나게 되기도 하고, 그저 정욕에 의해서도 만나게 되는게 사랑이라는 것.
    아니, 사랑이니 뭐니 하는 얘기가 너무 흔해 빠져 버린 얘기라는 것.
    나도 잘 알게 됐다.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런 경우 나는 실행에도 곧잘 옮기곤 했다.

    아, 나는 너무나 이율배반적이다.


    언젠가는 사랑 따위 개나 줘 버리라던 때가 있었다.
    또 언젠가는 세상이 그래도 아름다운 건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며 흐뭇해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사랑이란 그저 먹고 마시는 일에 지나지 않아, 배고프면 밥 찾아 먹고 목 마르면 물 마시는 것 처럼.
    하고 말하며 쓴 웃음 지을 때도 있다.

    지금은?
    지금 나는, 사랑이 두렵다.
    누군가에 속하는 것, 속하게 되는 것.
    그를 마음에 담는 것,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가는 것.
    자꾸만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는 것만 같아 나는 두렵다.

    사랑은 서로에 대한 구속이 아닌, 귀속이라던데.
    그 귀속을 받아 들일 준비가 내겐 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다시 누군가의 삶에 자취를 남기는 일이, 또 누군가가 내 삶에 자취를 남기는 일이 나는 그리 달갑지 않다.
    내 한 몸 일어 서기도 힘든 세상에, 또 누군가를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
    나는 너무도 두렵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리에 종이 울린대도, 
    지금의 나라면 못 들은 척 하고 싶을 것 같다.


    참 다행스럽게도, 지금 내게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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