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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런대로 잘 하고 있어
    Letter from Kunner 2005. 8. 4. 15:03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그게 남자건 여자건, 
    즐거운 기억을 함께 한 사람이건 그렇지 않던,
    내가 늘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던, 아니던..
    설령 너무 오랜 예전의 일이라 이름도 성도 가물가물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를 기억해 준다는 건 
    여전히 즐겁고 감사한 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누구의 기억 속에서도 또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별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 
    자꾸만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부각되고 싶었고, 늘 누군가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어했다.
    길건호 라는 이름 석자를 가진 나란 사람, 
    누구나 그렇듯 죽음을 맞고 나면 이 세상에 없는 거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면 나는 영원히 실재 하는 거라고.
    좀 맹랑해 보인다만 아주 어렸을 때 부터 나는 그렇게 되고 싶었다.

    좀 나이가 들고, 이런 저런 아픈 경험 또는 수치스런 기억들이 한 쪽 구석에 자리 잡았을 때..
    종종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 맘처럼만 된다면, 원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기억을 선별하여 지울 수 있다면..
    아니, 애초에 그런 일이 없었으면..
    그게 어떤 경우던, 나는 때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나의 말, 행동.. 표정과 몸짓 그 모든 것.
    나는 나를 둘러 싸고 있는 기억 속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경위야 어찌 됐던 간에, 서울로 올라 왔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이었다.
    나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아닌 나를 보여 줄 수 있었고, 또 때로는 온전히 나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몇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기억속에 존재하고 싶고, 어떤 기억 속에서는 자유롭고 싶고..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조금씩 조금씩 또 달라져 간다는 것.
    그 자유롭고 싶은 기억속의 나와 현실의 나는 조금 다르다는 것.
    그 불편한 기억들이 나를 조금 더 둥글게 만들어 간다는 것...
    여전히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니지만, 적어도 위안 삼을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그 불편한 기억들의 크기만큼이나 그 아픈 상처의 크기만큼이나...
    나는 조금 더 변화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기억들의 단면을 만나게 되더라도 조금은 당당해 질 수 있다는 것.
    감사한 일이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과거의 불편한 기억들에도 크게 아프지 않다.
    이런 날엔, 내 자신에게도 조금은 후한 점수를 주자.

    완벽하진 않더라도 절제할 줄 알고, 아직은 크게 모자라지만 반성하고,
    비록 선은 아니어도 선이고자 하는 노력이 크게 엇나가진 않은듯 해 흐뭇해..

    그런대로 잘하고 있어.



    *
    글을 쓰다 도취라도 해 버린 걸까..
    원래 쓰려 했던 얘기는 쏙 빠져 있네.

    스무살 시절, 알고 지내던 동생에게 연락을 받았다.
    별거 아닌 안부일 뿐이지만, 잊고 지내던 옛기억을 떠올릴 수 있어 즐거웠다.
    그 무렵, 과히 즐겁지 못했던 나의 인생을 떠올려 보며..
    감히 내 인생의 암흑이었다 말하는 그 시절, 나는 참 많이 아팠고 떠올리는 지금도 여전히 쓰리다.
    하지만, 조금은 가벼워 지고 있어..
    강산이 반 넘게 변하는 동안, 나 역시 느리지만 결코 쉼 없이.. 
    변해가고 있나봐.

    다행이야, 열심히 살아서..

    그리고 고마워, 나의 기억을 일 깨워 줘서..
    고마워, 나를 기억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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