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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의 이별
    Letter from Kunner 2006. 11. 1. 05:41

    피곤한 하루.
    다 마치지도 못한 일을 서둘러 접고 회사를 나섰다.
    오랜만의 칼퇴근이다.
    운 좋게도 집에 오는 전철이 한산했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펴들었다.

    "힘든 하루였어, 수고많았다"

    하고 안도하고 있는 찰나,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딴엔 소근소근 이야기 하는가본데.. 그래도 다 들린다.

    처음엔 뭐, 그러려니 하고 말았는데..
    소리가 귀 속을 파고 든다.
    얼굴을 보지 못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 그 답답한 말투.

    가뜩이나 어려운 책이라 책장이 잘 넘어 가지 않는데, 덕분에 한 쪽을 몇 정거장 지날 시간 동안 읽고 또 읽고 있었다.

    "
    책을 덮을까?
    아니지.. 괜히 신경쓰이게 하지 말자.
    자리를 옮겨?
    아냐아냐.. 그것도 민폐야. 신경쓰지 말자.
    "

    내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최대한 태연하게 책을 봐 주는 것이었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불과 몇장 넘기지도 못했고, 
    결코 원하지 않는 그 통화 내용은 퍽이나 잘 들려온다.
    아주, 귀에 쏙쏙 들어 오더군.(바로 옆자리니 당연하잖아!)

    그녀, 결국 싫은 소리 잔뜩 듣고 전화를 끊은 모양인데..
    만약 나라면 주위 사람 시선 의식되서라도.. 전철에서 그런 전활 받지 못했겠다, 싶을 정도였지.
    얼마나 무안할까 싶기도 하고.. 
    하기사 그녀의 절박함은 다른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으려나..


    정말이지 관심없던 그녀의 사정을 어렴풋이 듣고 난 후, 이런 저런 생각에 빠졌다.

    이봐요, 아가씨..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랬던 것처럼, 또 누군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단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거고, 이제 그 착각에서 벗어난 거야..
    그래, 그게 다야.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좋은 일은,
    맘 단단히 부여잡고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기왕이면 다음번엔 좀 더 오랜동안 당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로 가는 것 뿐이랍니다.

    물론,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겠으나 
    우리네 인생에선 여전히 힘든 이야기라 하겠지요.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 오는 길에,
    문득 뜨거운 주전자 이야기가 생각 났다.
    뜨거운 주전자에 손을 덴 아이는, 주전자 가까이에 가지 않는다던가.
    내내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주전자에 가까이 가지 않는 건 "아이"였다는걸 깨달았다.

    그래. 좀 더 자라면, 주전자를 다루는 방법을 익히게 되는 거였지.
    너무나 새삼스러운 얘기를 너무나도 늦게 깨달아 버렸네.
    어이없는 상황에서 또 하나 배우게 됐다.

    뜨거운 주전자가 무서워 아예 근처에 갈 생각도 못하는 나는,
    혹여 눈에 뭐라도 씌어서 주전자 근처에 가면 어김없이 데이고 마는 나는...
    그래.. 나는 여전히 성장하는 법을 모르는 어린 아이인가보다.


    날이 차지고 바람이 스산하니 기분도 울적한데, 
    때마침 울먹이는 여자 목소릴 들어 더 울적해졌다.
    쯥.. 왜 울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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