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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있다.
    Letter from Kunner 2006. 10. 24. 09:24
    *
    낯선 출근길에 나선지 보름이 됐다.
    주5일 근무니 꼭 열흘째 출근.
    아직 정겹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거의 갈 일이 없던 관계로 처음엔 그토록 낯설던 신길역, 여의도 역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점점 친숙해져 간다.

    고작 보름만의 일이다.


    **
    출퇴근 길에 적잖은 위안이 되어 주던 책들을 다 읽어버렸다.
    다른 책을 사게 될 때 까지, 한동안 적적할 것 같다.
    착수금이 예정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다.
    보고 싶은 책이 참 많은데, 돈 없이는 책도 못 보는 세상이다 - 당연하다.


    ***
    그동안 모아 둔 돈으로 이사하고 집 수리를 한 탓에 수중에 돈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 와중에 착수금이 늦어 지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다.
    이대로 가다가는 생존에 위협을 느낄 날이 머지 않았다.

    늦어진 국정감사는 엉뚱한 곳에 불똥을 튀었다.
    이제와 돌이키건데, 나의 "믿는 구석"은 그저 구석에 처박아 두기에나 적당할 것 같다.

    언젠가도 느꼈던 것이지만, 불확실한 것에 기대는 삶이란 그야말로 위태롭기 짝이 없다.
    튼실한 뿌리를 두지 않은 섣부른 예측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기폭제에 불과하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잠시 뒤로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약저축을 깰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은 아직은 그냥그냥 견딜만 하다는 얘기일테다.


    ****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야근을 한다.
    아직 본격적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될 단계는 아니지만, 지금 나의 실력으론 도저히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번도 안 해 보고 관심도 없던 것을, 딱히 배울 의지도 없던 일을 덜컥 수락한 대가 일 뿐이다.
    빡빡한 일정과 높은 의존도, 게다가 결코 적지 않은 보수를 감안하면 내가 느끼는 불안은 일종의 양심선언인 셈이다.

    그래도 그 불안이 나를 휘감아 절망으로 빠뜨릴 일은 없을 것이다.
    외려 새로운 것을 알아 나가는 재미가 있고(자의든 타의든), 적당한 긴장과 부담이 스릴을 느끼게도 해 준다.
    게다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됐을 때, 한껏 고양될 나의 자존심(설사 그게 허영이든)에 벌써부터 배부르다.

    매번 하던 일, 고작 언어 하나 바꿔서 하는 것 가지고 되게 설레발친다 하겠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꽤나 오랜동안 식어 있던 내 마음의 불을 지피게 된 이 감동을, 
    "설레발친다" 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지금은 죽어라 노력해도 모자랄 판이니, 단 열매를 누리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야 하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
    모두 퇴근한 뒤, 혼자 남아 책을 뒤적거리고 바삐 키보드를 두드리고..
    이런 경험도 참 오래간만의 일이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래 지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러니 결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었던.
    모르는게 당연하고 못 하는게 당연하니 거리낄 것이 없었던 그때, 그 배움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지.." 라며 넋두리하던 내가 다시 "젊어졌다".
    이번 일은 경제적 의미 - 그 이상의 것이 내게 있다.


    나는 살아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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