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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냉정과 열정 사이
    쉼을 위한 이야기/영화 2003. 11. 23.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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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냉정과 열정 사이" 라는 영화를 봤다.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한문으로 되어 있는 걸 보면, 冷靜 情熱 이라고 써 있던데..
    정렬이 열정으로 변한건 어떤 이유일까?
    그저 냉정에 대한 대구를 맞추기 위해서였을까?

    난 원래 일본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영화는 공감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영화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 것은..
    내가 처음으로 봤던 일본영화들이 너무 난해하고, 정서가 맞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선인겹으로 작용해 버린 것이 아닐까.

    내가 처음으로 본 일본영화는 "하나비" 였다.
    일본문화 개방 이후 최초로 개봉한 일본영화고 그러다 보니 썩 유명해져서 나도 보게 됐는데..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짜증이 일었던 것을 기억한다.

    철학적 메시지를 시각적인 효과에 담았다는 평을 듣는 영화 답게 뭔가 현란한 이미지가 자꾸 보이긴 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라인, 너무 잔인해 인상이 찌뿌려지는 장면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그림들..
    그게 영화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또 그 관계들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아야 하는 건지..
    18살의 나로서는 그 영화를 받아 들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거 같다.
    - 물론, "하나비"는 꽤나 수준 높은 영화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이런 평과 나의 감상과는 별 관계가 없다.

    아무튼.. 그 이후로 봤던 일본영화들이 줄곧.. 나와는 별로 맞지 않았다.
    스케일 큰 사무라이 영화로 유명한 카케무샤는, 인간의 정체성이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듯 하지만..
    일부 일본영화들 특유의 그 현란한 화면.. 정말 생각이란 걸 못 하게 만드는 그 분주함 때문에 오히려 마이너스 였고..

    "오겡끼데스까" 라는 대사로 유명한 러브레터 역시..
    내겐 "배경만 예쁘다." 라고 밖에 말 못 할.. 영화에 불과했었다.

    그렇게 일본영화들은 늘 내게 실망을 안겨주기 일쑤였다.
    게다가 영어로 된 외국영화에 익숙해서인지.. 일본어가 자꾸만 귀에 거슬려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되었던 듯 하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과 대개 비슷하다.

    아무튼 나는 일본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이런 이유들이 바로 "정서의 차이" 가 아닐까 생각하곤 해 왔다.
    그들만의 심각함, 그들만의 잔인함의 미학. 그런 것들이 일본영화에 익숙하지 못 하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해 왔다.


    적어도.. 냉정과 열정 사이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람들이 대체로 괜찮은 영화라고 평을 많이 해서..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봤었다.
    하지만 일본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그냥 생각만 하고 말 뿐이었다.
    그러다 오늘.. 시간 떼우기 용으로 영화를 보게 됐다.

    처음엔.. 어느 정도 지루했었다.
    영화의 처음 절반 정도는.. 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지루한 것 같아서 "일본영화가 다 이렇지 뭐.."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자 버릴까.. 눈도 아픈데 하며 꾹꾹 참고 보고 있었다.

    아마 남자 주인공인 유타카와 여자 주인공 진혜림이 아니었다면, 영화를 꺼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주를 이루고 있는 유타카의 부드러운 이미지와 간혹 드러나는 진혜림의 발랄함이 영화에 좀 더 쉽게 빠지게 만들지 않았나 한다.


    이야기는 현재 - 과거 - 현재 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무대는 이탈리아이다.
    스토리는 참 뻔한 얘기여서.. 카피만 보고도 대충 어떤 영화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영화는 스토리가 뻔하다는데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호응을 쉽게 얻어 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사랑이라는 진부한 코드는 늘 어느 정도의 흥행은 보장하기 때문이다.)

    10년을 기다린 사랑.. 이라는 카피만 들어도.
    이 영화가 얼마나 뻔한 얘기를 가졌을 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마도 뭔가 어긋나서 둘 사이가 틀어지고 10년이나 지나도록 그 사랑은 변치 않으며 우여곡절 끝에 둘은 사랑에 골인한다는..
    참 뻔하고 유치한 사랑 이야기를 늘어 놓을 거란걸 말이다.

    하지만.. 그 뻔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몹시 볼 만 하다.
    우선, 두 주인공이 "소나기" 같은 데서 나오는 순수한 인물들이 아니라는데 공감이 가기 시작한다.
    준세이는 아오이를 잊지 못하지만 다른 여자와 사귀고 있으며, 아오이 역시 다른 남자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둘 다 필요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 자유스러운 사고방식은 진짜 사랑을 위해 곁에 있는 필요에 의한 사랑을 단호히 거부하는 독특한(?) 능력도 갖고 있다.
    등장인물들이 뻔한 스토리에 나올 법한 지고지순한 캐릭터가 아니라는게 무척 흡족했다.

    특히 준세이가 다시 이탈리아로 가기 전, 메미와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어.. 이거 너무 하는거 아냐?" 라고 생각될 정도로 준세이는 단호했다.
    그런 단호함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되지만...
    준세이에게 있어 메미는 그저 필요에 의해 잠시 만난, 그저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고자 하는 수단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걸 깨달은 메미가 참 가엾단 생각도 들고..
    준세이는 아오이를 잊고 메미와 잘 해 보려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곤 하지만...
    그리고 아오이와 그의 남자친구 마빈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사랑을 다룬 영화 답잖게 리얼리티(!!)가 살아 숨쉰다. 하하..

    그래서일까.

    메미와 마빈의 아픈 이야기도, 세기의 로맨스 앞에서는 별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감독의 노련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아니, 원래 스토리인 동명의 소설을 쓴 소설가의 재능을 더 높이 사야 하나?
    이런 설정에도 불구, 거부감이 전혀 없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오히려 영화는 거부감 따위는 커녕 줄곧 준세이와 아오이의 재회만을 손꼽게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의 시놉시스를 보면, 극의 주무대를 이루고 있는 피렌체와 밀라노, 그리고 도쿄는 각각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상징한다고 한다.
    "과거"에만 묶여있는 피렌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재"의 밀라노, 그리고 끝없이 "미래"로 치닫는 도쿄.
    준세이의 직업이 문화재 복원가인 이유가 설득력을 갖는 동시에, 10년의 사랑이라는 주제가 효과적으로 드러나는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아오이의 직업이 보석상 인것도 단순한 설정만은 아닌 듯 하다.

    준세이는 이제는 남의 여인이 된 아오이를 그리며 언제까지고 가슴에 아오이를 품고 살아갈 것임을 다짐한다.
    그리고 준세이는, 언제까지고 영원할 수는 없을 그 감정을 문화재 복원이라는 "현재"를 통해 끝없이 재생시킨다.
    떠난 사랑을 간직하고 변함없이 간직한다는 다짐은 고대 미술품을 복원하고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며, 더 나아가 그 사랑을 다시 찾는 것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다시 문화재 복원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를 찾지 않았다면, 10년의 사랑은 물거품이 되었을테니 말이다.

    영화의 제목, 냉정과 열정 사이.
    이 짧은 글 사이에서 참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준세이의 친구로 나온 유스케가 이런 말을 했다.
    "너희 둘은 너무 강렬한 관계였어. 그걸 보고 나는 깨달았지. 사랑이 너무 깊으면 인연이 될 수 없다는 걸 말야."
    뭐.. 대사가 정확히 저렇진 않았지만 대충 위와 같은 뜻이었다.
    열정은 과거의 두 사람, 준세이와 아오이의 사랑이다.

    극의 후반부에서 아오이는 마빈을 떠나 보내며 이런 말을 한다.
    "어떤 결과가 있던지 간에, 내 모든 인생이 달렸어요. 준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에요." 라는 말.
    이유야 어찌됐던 연인이었던 마빈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준세이에 대한 아오이의 감정은 열정 그 자체지만 실제로 준세이와 재회한 아오이는 너무도 냉정했다.
    그것은 불우했던 어린시절 때문에 생긴 아오이 특유의 성격도 작용하는 듯 하지만, 이 냉정함이야말로 아오이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 아닌가 한다.
    바로, 마빈이 원했던, 하지만 단 한번도 가질 수 없었던 아오이의 진실 말이다.

    과거의 열정과 현재의 냉정.
    그리고 그 사이에 앞으로 이어질 진실한 사랑이 있다는 설정이 아닐까.


    영화 말미에 준세이가 아오이를 잡기 위해 밀라노로 갈 때 나오는 독백이 큰 여운을 남겼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냉정과 열정, 사랑이라는 코드와 연결시키는데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마지막 독백.

    "나는 과거를 돌아 볼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만 할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돼."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사이에 사랑이 있다...


    나의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그 사이에도 과연 사랑이 있을까?


    2005-02-24 오후 9:30:21에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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