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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stain쉼을 위한 이야기/영화 2004. 11. 28. 05:27오랜만 - 아니, 이번 주 초에 영화를 봤으니 그리 오랜만도 아니네.
하지만 요 며칠 집에서 한가로이 있을 새가 없었거든..
덕분에 참 오래간만에 영화를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어.
오늘도 저녁때가 다 되서야 집에 와서 컴퓨터 고치느라 낑낑대다 새벽을 넘겨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
전에 다운 받아 놓고, 봐야지.. 봐야지 하며 별러 오던 빅 피쉬 - Big Fish 를 시작으로,
지금 막 휴먼스테인 - Humanstain을 끝냈어.
빅 피쉬는, 팀버튼의 영화 답게 유쾌한.. 아니 좀 심할 때는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어.
역시나, 팀버튼의 영화답게 그 사이사이에 뭔가 메시지를 심어 둔 흔적이 역력하던걸.
“금붕어는 좁은 어항 속에서 기를 때는 조그만 채로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더 큰 어항에 넣어보면 두 배에서 네 배까지도 자랄 수 있다.” 등...
하지만 그 메시지란게.. 딱히 절실히 와닿지는 않는 느낌이었어. 어쩐지 겉 돈다랄까.
아마 내 생각엔, 메시지를 스토리 텔링에 넣은게 아니라 스토리와 관계없이 스치는 대사들 사이사이에 넣어 두어 그런게 아닐까.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렸을 때 소풍 가면 하던 보물찾기 처럼,
많이 찾은 사람은 보물찾기에 만족을 느끼지만 그러지 못하면 이게 무슨 놀음이느냐고 투덜거리게 되는 법.
이 영화도 그런 것일까.
보물찾기에 소질이 없는 나는 대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주제가 뭔지 모호했어.
영화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짚고 넘어 갈 문제는..
웃기려거든 확실히.. 감동을 주려거든 확실한 감동을..
그러니 자꾸 화성침공이 생각나는거잖아, 단추씨!
(사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엔 이렇게까지 혹평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새 감흥이 식은걸까.^^;)
사실 영화에서 뭘 얘기하려고 하는지, 또는 그 영화의 각 장면들이 어떤 뜻으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내가 확실히 안다고 할 수는 없어.
나는 그야말로 아마추어 중의 아마추어니까.
그저, 나의 영화 감평이 늘 그렇듯 내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써내려 갈 뿐이지.
그러니, 뭔가 전문적이고 확실한 것을 원한다면 나의 감상문은 읽지 말아야 할지 몰라. ^^;
그리고 난 후엔, 안소니 홉킨스와 니콜 키드만이 열연한 "휴먼 스테인-Humanstain"을 보게 됐지.
자, 오늘의 문제(文題)가 시작된게야.
처음에 영화 제목이 "휴먼스테인" 이란걸 알고는 저게 무슨 뜻을 가졌을까 생각했었어.
휴먼, 사람이고.. 스테인, 염료.착색제.. 뭐 이런 뜻이니.
직역하면 사람착색제?
염색체? 염색체는 chromosome이니 염색체는 아닌데..
아무튼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사람을 착색한다길래 뭐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
내지는 사회적 영향을 받는다 정도로 생각했었어.
그리고 이 질문은, 적어도 극 종료 30분 전 쯤부터는 대충 파악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어.(아직도 명료하진 않지만)
휴먼스테인은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얘기야.
어쩌면 빅 피쉬에서의 애쉬튼 정도로 작은 마을일지 모르지.
영화가 끝난 후,
"In memory of Jean Yves Escoffier" 하는 자막이 나오던데 아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일까?
영화는 하얗게 눈이 내린 새벽길로 시작해.
멀리 동이 틀 무렵, 아직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그 길에 뜬금없이 교통사고가 나고 장면이 넘어가 버려서.
영화 시작엔 어리둥절 했었어.
영화가 끝날 무렵에 그 사고 내용을 자세히 보여 주는 수미쌍관식 배치를 했는데, 감독이 의도한 바대로 내가 영화를 느꼈는지는 솔직히 의문이야.
영화는 전체적으로 콜만(안소니 홉킨스)와 퍼니아(니콜 키드먼)의 애정행각과 콜만의 회상을 콜만의 친구 - 소설가가 정리하는 형태로 전개돼.
그들의 애정행각에 참 지리하다 싶을 정도로 시간을 길게 할애해서 영화의 초반부에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뭘까?" 싶기도 했어.
단순히 퍼니아란 팜므파탈을 만나서(퍼니아가 팜므파탈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콜만의 인생이 망가진다는 건가?
아니면, 상처입은 사람들끼리 보듬어 간다는 내용인가?
그렇게 진부하고 뻔한 얘기, 꼭 해야 하나? 그것도 이렇게 지리하게?
이런 생각을 하며 영화를 봤더랬지.
하지만, 후반으로 가면서 슬슬 영화는 가속을 붙여 나가고..
특히 콜만의 회상을 짚어 갈 수록 영화는 콜만과 퍼니아의 만남이 아닌,
콜만의 이율배반적인 삶, 그리고 그 고통의 무게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어.
그제서야 어렴풋이, 왜 "휴먼스테인"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떠오르기 시작했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내가 생각하는 휴먼스테인은 중의적인 의미로
하나는 말 그대로 피부색.
콜만의 평생을 그렇게 암울하게 만들었던, 그리고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히게 했던 이유.
바로 그 피부색의 의미로 휴먼스테인 - 인간착색제가 나왔을 것 같고..
다른 하나는 사회의 잣대로 인한 길들이기야.
극 후반에 콜만의 장례식에서 콜만의 과거 직장 동료가 추도사를 읊는데,
거기 이런 말이 나오지.
"콜만과 그 아내 아이리스는 편협하고 어리석은 사회의 독선적 잣대에 배신 당한 겁니다."
그래, 이 사회의 잣대 - 인간을 검게도, 희게도 만드는 이 착색제 말야.
실제로 검은 콜만은 흰 것을 좋아하는 세상의 잣대에 맞추려다 검지도 희지도 못해 어디서도 가슴을 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어.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한 강한 컴플렉스를 가졌던 콜만, 인생의 성공과 안녕을 위해 백인인 척 위장하느라 가족도 친구도 모두 버리고 세상에 홀로 서게 돼.
그리고 위선이 또 다른 위선을 낳듯, 콜만의 이율배반은 점점 가속을 붙이게 되어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데서 시작해 모든 흑인을 증오하는 데 이르지.
자신이 가진 휴먼스테인, 그 자체를 증오하기에 이르게 되는거야.
하지만.. 언제 밝혀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두려움, 가족을 져버린데 대한 죄책감.
흑인이지만 흑인이 아닌, 백인이지만 백인이 아닌 정체성의 혼란.
그의 행복을 위한 위장은 철저한 고독과 불행으로 그의 인생을 암울하게 만들었을거야.
그리고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후라, 또 그럴 용기도 없어서 그는 비참한 만년을 맞게 되나봐.
사회에 대항할 수 없는 힘없는, 또는 용기없는 사람들 -절대 다수지- 이 짊어져야 할 고통의 무게.
그리고 그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할 수 없는 - 뻔뻔한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 바로 우리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의 등장인물 중 단 한 사람,
퍼니아의 남편은 검은 걸 검다고 확실히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야.
이 등장인물이야말로 참 한마디로 단정하기가 어려워.
그들을 죽여야 된다고, 그리고 죽일거라고 말하는 그 사람.
그런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짓을 하니 우리는 그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말하지.
참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감추고, 어떻게든 제도권에 머물기 원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오히려 그렇지 않았던 그 정신병자는 유유자적히 얼음낚시를 즐겨.
아들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면서...
그렇다고 영화가 이런 유형의 캐릭터를 지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 그야말로 아이러니지.
우리는 그들을 "정신병자"라고 부르지만 꼭 그만 정신병자일까?
집단 최면에 걸려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 과연 누가 진짜 정신병자일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 가면서,
뭔가 아쉬운 느낌이 계속 남은 건 왜일지 모르겠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좀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점이지.
극 초중반, 콜만의 퍼니아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사랑에 너무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닌가 안타까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인생의 치부를 딱 한 사람 - 인생의 마지막 사랑에게,
자신만큼 상처 입은 사랑에게 말해 준다는 것, 그렇게 서로 보듬어 간다는 것, 충분히 논리에 맞긴 하지만..
극 시작부터 무턱대고 베드신을 보여 주느라 그것도 참 재미없게 편집하느라 애쓸 필요, 과연 있었을까?
뭐.. 아무튼 그래.
퍼니아가 콜만에게 지나치게 화내고 혼자 후회하는 장면이 있어.
그 전의 퍼니아는 간섭도 구속도 원치 않는, 하지만 따뜻한 체온(표면적으로는 쾌락)을 필요로 하는 창녀에 불과하지만.
콜만과의 사랑을 통해 진짜 자기가 원하는 걸 깨닫게 되는거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니아의 독백은 아주 의미심장해.
"사람 손에 자란 까마귀. 그래서 야생과는 다른..
까마귀로 살 수 없는 까마귀.."
어둠으로 점철된 퍼니아의 삶, 그 안에 길들여진 퍼니아에게 콜만이라는 사랑은.
그렇게 한편으론 빛이, 또 한편으론 어둠이 되는거야.
야생의 자유, 하지만 야생이기에 겪는 위협, 공포.
새장 속의 새는, 새장 안에서만 제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이지.
설령 그 새장이 "편협하고 어리석은 잣대" 라 할 지라도..
인간인 이상 그 새장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거야.
콜만과 퍼니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그저 spook 라 했을 뿐인데..
본의와는 관계없이 인종차별로 몰려 직장을 잃고, 그 여파로 아내가 숨지게 돼.
그저 수업에 단 하루도 출석하지 않은(뜨끔..) 학생에게 "혹시 유령이냐?" 고 빈정거린 것이 spook 의 다른 뜻, nigger 로 받아 들여져 인종차별로 몰아 가는거지.
이건,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아.
하지만 지성체라는 인간이, 그것도 교수라는 엘리트들이 앞뒤 상황을 안다면 누구나 판단할 수 있는 문제에 이상한 잣대를 들이대.
뭐든 한번 꼬아서 보곤 음모와 테러로 잇는 인간의 흑색심리지.
하나하나의 개체는 어떨지 몰라도, 모이면 문제가 된다는 것인가?
그 광기에 사로잡힌 시류는 인류가 점점 발달해 간다는 대전제를 깡그리 부정하게 만들고 있는거야.
사물을 구분하는 잣대가 피아의 규정을 위한 잣대로 오용되고, 그로 인해 생긴 사회적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두 "적"이 되지.
단순히 사물 또는 상황으로서 A와 B를 가려야 할 상황에서 인종이니 성이니 지역이니 국가니 하는 형이하학 개념에서부터 종교니 이념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까지 다 끌고 내려오는 거야.
형식에 치우쳐 본질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들이지.
그리고 그건 결국 사회적 통념, 그 잣대의 설정에 문제가 있음이고.
사람 사는 세상 어디든 이런 것 없으랴만 왕의 계모가 죽었는데, 이게 국장거리냐 아니냐. 또는 상중에 어떤 복식을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시작해 피아를 구분하고 아군을 결집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단계를 거쳐 본래 목적을 잃은 채 음험한 음모론의 제물을 필요로 했던 조선 중기 "예송논쟁" 이나.
같은 얘기로 시간이 흐르며 본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행된 "마녀사냥" 등이 고래로 대표적인 경우겠지?
가까이 우리네 친일파, 빨갱이 같은 일만 해도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빚어낸 촌극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이렇게 거창한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 가면서 얼마나 많은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있는가.
그리고 그 위선의 가면을 정당함이라 부르고, 혹여 그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게 될까봐 나를 깎고 잘라.
그렇게 만든 그럴듯한 행복에 자신을 집어 넣어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 갇혀 평생을 수인(囚人)으로 살아가는 건 아닌가...
휴먼스테인은 그렇게 우리에게 "한번쯤 더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듯 해.
콜만은 왜 평생을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야만 했는가, 또 퍼니아는 왜 그렇게 험하게 사는 법을 터득해야만 했는가.
왜 그녀는 자기 얘기를 하는 걸 그토록 꺼려해야 했는가.
고독한 콜만과 상처입은 퍼니아의 마지막 사랑, 그 동병상련의 보듬기.
왜,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영화는 묻고 있었어.
그리고, 혹시 너는 그런 짐 가지지 않았는가.
사실 난, 자꾸만 내 모습이 콜만에 오버랩돼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기분이 썩 편치 않았었어.'쉼을 위한 이야기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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