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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묵공(墨攻)
    쉼을 위한 이야기/영화 2007. 6. 10. 14:20

    인류의 역사는 전쟁사에 다름 아니라는 말이 있다.
    인류가 기록이란 방식으로 역사를 써내려 온 이후 지금껏, 역사란 전쟁사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이나 그 수행 과정등을 보게 되면 당시 역사의 아주 세밀한 곳까지 두루 살펴 볼 수 있어서 전쟁이란 곧 그 시대 역사의 길잡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전쟁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란, 사람이란.. 도무지 싸우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


    참혹한 전장의 안개 속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다.
    늘 높은 곳으로만 향할 것 같은 시대의 정신도,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쳐박히고 마는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잔혹한 생존게임이 시작된다.
    그 이유가 민족이든, 종교든, 무엇이든간에 - 심지어는 아무 이유없이 그저 한 개인 또는 집단의 말초적인 이익을 위해서 벌이는 경우도 있다.
    전쟁 속에서는 정의의 기준이 모호해진다.
    오직 이기는 것이 정의요, 하나라도 더 많은 적을 죽이는 것이 정의가 된다.
    나와 똑같이 살아 숨쉬는 사람.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아들이며, 누군가에게는 남편, 누군가에게는 친구.
    또 누군가의 딸과 아내를 그렇게 죽이고야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죽음으로 내몬 당사자들 역시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향하게 된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전쟁에 반대하여, 묵가는 "비공"을 주장했다.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약소국의 수비를 도와 전쟁을 무위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성 하나를 위해서라면 천리길도 마다 않는다" 하며, 전장으로 향해 약소국을 강대국의 말발굽으로부터 지켜냈다.
    어떤 명리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전쟁을 막겠다는 생각만으로 전장에 뛰어든 묵가는 특유의 수성술과 전법으로 불리하던 전황을 바꿔 버리는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면 당연한 공치사도 않은채, 또 다시 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묵가는 또한, "겸애" 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다툼 없는 진정한 낙원의 상을 제시했다.
    "비공"으로 단순히 전쟁을 억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두루 사랑하라는 말로 세상을 교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의 전쟁 억지력이 과연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을까?
    결국 그들은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결코 그럴 수 없었고, 그로부터 2500 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란 결코 전쟁을 떼어 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우울한 이야기마저 해야 할 판이니 말이다.
    또한 묵가가 말한 "겸애"는 결코 이뤄질 수 없었다.
    다름아니라, "겸애"사상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내 아이만큼 다른 사람의 아이를 사랑할 수 있으며, 어찌 내 부모만큼 다른 사람의 부모를 기릴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걸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가족", "내 것" 이라는 개념이 없는 전사회적인 정신적/물리적 구조의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흡사 헐리웃 영화 "매트릭스"나 "데몰리션맨" 따위에서나 볼 수 있는 "번식 시스템"에서만 가능할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영화 같은 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수천년 전 묵자는 이렇게 말했다.

    " 죄 없는 사람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명을 죽이면 인간 백정이 되는데,
     전쟁을 일으켜 수만 명을 죽인 자는 도리어 영웅이 되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 

    묵자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물을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전쟁의 아이러니이다.
    그걸 아이러니라고 말한 그 자신도 같은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던, 슬픈 운명 같은 인간의 아이러니이다.


    영화 속에 혁리가 조군의 많은 군사들을 죽인 후, 정신적인 혼란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무엇을 위해 그들은 죽어야 했고, 무엇을 위해 그들을 죽여야만 했는지 혁리도, 영화를 보고 있는 나도 알 수 없다.
    과연 무엇이 묵가가 부르짖던 "겸애" 이며, 무엇이 "비공"인가.
    어차피 그 시대에 누가 주인이 되어도 일반 백성들이 사는데는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어제 양군을 위해 성문길을 쓸고, 오늘 조군을 위해 성문을 활짝 열어 향을 피웠다 한들 누가 뭐라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양성을 들어 조군에게 항복했더라면, 차라리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그도저도 아니라면 어서 양성이 떨어지고, 조군이든 누구든 천하를 통일해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세상이 빨리 올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됐더라면, 묵가가 그렇게 바라던 전쟁의 종식에 한발 더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었을까.


    전쟁이 한창일 때에는 민중의 환호를 한몸에 받지만, 막상 전쟁이 끝나면 쫓기는 신세가 되어야 했던 혁리.
    어쩌면 묵가는 전쟁을 막기는 커녕, 끝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요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전쟁이 끝나면 다음 전쟁으로, 다음 전쟁이 끝나면 또 그 다음 전쟁으로.
    영화 속에서 양공자가 혁리에게 했던 질문처럼, 이번에는 조군과 싸우고 다음에는 조군을 위해 제군과 싸우며 영원히 끝나지 않는 전쟁을 부추기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묵가는 전쟁 속에서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슬픈 운명의 소유자들은 아니었을까.


    손자병법에 보면, 병법의 도는 적을 멸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에 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더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전쟁을 하지 않고도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전쟁이란, 그런 목적을 위해서만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손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손자조차, 자신의 가르침이 병법의 도가 아닌 단순한 살육 도구로 쓰이는 것을 막지 못했다.


    혁리가 양성을 떠나고, 어린 아이들이 그 뒤를 잇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후에 그 아이들이 묵가로 맹위를 떨쳤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그들 역시 혁리처럼 또 다른 아이러니의 한 궤를 이어갈 뿐이었을 것이다.
    만인을 사랑하라지만, 정작 사랑하는 여인의 목숨조차 구하지 못한 혁리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묵공이란, 배움(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한없이 어두울(墨)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슬픈 초상은 아니었을까.



    - 동양문화사 레포트. 20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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