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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벌써 스물 여섯이 되었다.
    Letter from Kunner 2004. 7. 6. 22:43
    I.

    오늘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평소처럼 웹서핑을 좀 했다.

    오늘 내 눈길을 끈 것은 부정(父情)에 대한 글이었는데, 그 글에 달려 있는 리플들은 대체로 아버지의 사랑과 어느 덧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된 자신에 대한 독려 또는 한탄이 주를 이루었다.
    스크롤을 내려가며 리플을 읽던 중 나는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

    "어느새 나는 열 한 살이 되었다."

    열 한 살이라... 만 나이를 말하지는 않을테니 아마도 초등학교 4학년이리라.
    "어느새 나는" 이란 말과 "열 한 살"이라는 나이가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피식 웃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열 한 살이 되었다라...
    그 두배가 훨씬 넘는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로서는 우스울 수 밖에 없는 얘기지만, 글을 쓴 당사자는 자못 진지했으리라.

    아마, 그 당시 나 또한 그랬을거야.. 생각하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됐다.

    그러다 문득, 요즈음의 나를 보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런 탓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점점 더 조급해 하는 것 같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뭐 하나 딱히 이뤄 놓은 것은 없고, 그렇게 시간은 가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막막하고..
    20대는 부딪히고 좌절하는 시간들의 연속이라는 얘기가 있다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성공을 이룬 영건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걸 볼 때 조급해하지 않을 재간이 없다.
    무의식중에 나는, 그렇게 조급해 하고 있었다.

    나는 늘 이렇게 말하고 있던 건 아닐까?
    "어느새 나는 스물 여섯이 되었다..."



    II.

    요즈음의 나는 책을 잘 읽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게 한달도 넘은 듯 하다.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를 명상록처럼 읽다 지친 후, 다른 책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또 요즈음의 나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는다.
    나의 앞길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자고 마음 먹은 후, 얼마간 하는 듯 하더니 도로 예전의 나태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즈음의 나는, 많이 소극적이 됐고, 나를 둘러싼 일들에 방관을 일삼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는건가.
    그러니 조급할 수 밖에..

    기회는 준비하는 자에게만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특별한 기회도 다른 많은 경우처럼 별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마 이 정도 간단한 이치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만 아는 것은 진정 아는 것이 아니라 했던가.
    머리와 입으로는 그럴듯한 얘기를 지어내며 고명한 사람들을 흉내내는 듯 하지만, 가슴은 나의 행동은 전혀 변함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된 후에도 이렇다 할 행동변화가 없음에 크게 애석하다.



    III.

    나는 "벌써" 스물 여섯이 되었다.
    앞으로 나는 스물 일곱이 되고 여덟이 되고, 그렇게 서른, 마흔이 될 것이다.
    누구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으므로, 이변이 없는 한 아니 이변이 있다해도 나는 그렇게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어느새 열 한 살이 됐다는 그 학생(소년? 소녀? 나는 모른다.)도 언젠가는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될 것이다.
    내가 그렇듯, 내 아버지가 그랬듯...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흔히, 그 나이만 되도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나는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말처럼 되진 않을 거라고 깎아 내려 듣지만, 실현불가능한 얘기므로 더욱 처연하게 들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열 한 살의 학생을 보며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나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느끼리라.
    그네들은 내가 후회하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며 모르긴 해도 많이 우스우리라.
    나 역시 그럴 것이므로..




    添 1)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땐 정말 중요하다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음을 느끼게된다.
    나이를 먹다 보면, 정말 가치 있다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별 것 아닌 - 그저 세상의 많은 것들 중 하나임을 -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불변의 가치를 갖는 것들도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조금만 냉철히 생각해 보면 구분지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 생각에만 사로잡힐 당시에는 그런 냉철함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 딜레마지만..

    添 2)
    비겁한 녀석일지 모르겠다 나는.
    저항적이고, 공격적인 것과 용기는 비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참된 용기가 없기에 소영웅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빌어먹게도.. 나는 참 용기가 없나보다.

    添 3)
    살아가면서 겪는 인간 관계 설정의 어려움.
    그 원인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서로 코드가 맞지 않아 관계를 맺는게 불가능한 경우,
    다른 하나는 이미 맺어진 관계를 수정해야 할 때, 서로의 눈높이가 다른 경우.
    이미 맺은 관계를 수정하는데 몹시 곤욕스러움을 느끼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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