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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괜찮아.. 괜찮아.
    Letter from Kunner 2006. 4. 14. 07:45
    괜찮아.
    다시는 축구화를 신을 수 없게 된 것도 아닌걸. 
    그저 반년 - 어쩌면 그저 조금 더 길뿐인 시간을 잠시 참고 있으면 되는거다.
    아주, 잠시만.

    괜찮아.
    월드컵이란 무대를 밟는 것이 선수에게 얼마나 큰 영광일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월드컵은 저 반니스텔루이나 네드베드에게조차 생소한 무대가 아니냐.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물며 칸토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까짓 월드컵 좀 못 나간들 그게 무슨 대수냐.
    월드컵 - 그 한달여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앞으로 너와 내게 주어져 있는데 말이다.
    월드컵이 주는 의미가 네게 얼마나 클지 모르는 바 아니다만.
    괜찮아, 그렇다고 세상이 끝난 건 아니니까.
    괜찮아.. 괜찮아.


    바라고 또 바랐다.
    이번 월드컵에서 네가 비상하기를 말야.
    너를 비웃는, 너를 바닥으로 끌어낸 사람들 앞에서 크게 포효하기를.
    이게 바로 이동국이라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는 걸 사람들에게 알려 주게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넌 충분히 자격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신은 이번에도 아니라는구나.
    그저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는구나.


    시련은 하필이면 이럴 때 찾아 왔다.
    사람들이 리그에서의 지난 너의 성적을 문제삼자, 보란듯 연속골을 퍼붓고 있던 이 때.
    하필이면 월드컵이 두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시련은 찾아 왔다.
    차라리 그게 반년 전이었으면, 차라리 그게 반년 후였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가정(假定)을 허용하지 않는다.
    무력한 인간은 그저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진실에 나는 한참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괜찮아.
    몇번이고 말하지만, 이렇게 끝난 것이 아니다.
    너의 싸움은 이제 막 다시 시작되었을 뿐이니..
    좌절은 아직 한참 이르다.



    나는 아직도 그 언젠가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
    네가 영영 내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해도, 네가 다시는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너를 끝까지 지지하겠노라고.
    그리고 네가 은퇴하기 전까지, 언제고 너의 비상을 다시 꿈꾸고 살아 가겠노라고.
    네가 네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네가 선수로서 최선을 다하는 한 영원히 말이다.

    그런 네가 이번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내 영웅의 이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난 질곡의 시간을 헤쳐 나온 그 순간, 이미 넌 나의 영웅이 되었으니까.
    남자의 가슴에 든 영웅은 쉽게 바래지 않는 법이다.



    오늘 프랑크푸르트에서 날아든 비보를 접하고 나는 한참을 굳어 있었다.
    재활치료 보다는 수술을 선택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던 나지만, 그걸 실제로 확인하고나니 황망함을 감출 길이 없다.
    네가 수술이냐 재활이냐의 선택을 두고 고심하고 있노라는 며칠 전 기사를 보고 나는 생각했다.
    설령 네가 수술이 아닌 재활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너의 선택은 존중받아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만에 하나 그 결과가 좋지 않다 하더라도 그건 너의 선택이니.
    상황에 따른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일테니 나는 네 의견을 존중하겠노라 생각했다.
    물론 나는, 내심 재활이 아닌 수술을 바라고 있었다.
    수술을 하면 이번 월드컵 출전은 영영 멀어진다지만, 그 잠시를 위해 네 남은 인생을 모두 거는 것은 너무도 무모하다.
    그리고 지금, 바람대로 됐지만 내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음을 나는 아프게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지금, 감히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당자는 오죽하랴.
    지금으로선 어떤 말도,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우리, 괜찮다고 말하자.
    아직은 우리, 갈 길이 더 많이 남아 있음을 믿자.
    우리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비탄과 절망이 아니라, 환희와 희망임을 믿자.


    이 상황에서 희망을 말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네 인생 최고의 날이 오지 않았음을 믿자.
    그리고 그 최고의 날이, 적어도 올해의 월드컵 무대가 아닐 것이라는 것쯤은 인정해 주자.
    내게 그렇듯, 네게 예비된 최고의 날은 과거의 그 언젠가가 아니라 앞으로의 언젠가 일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아직 네겐 (어쩌면 두번 - 또는 그 이상의) 월드컵이 더 남아 있다고 하지만.
    이번 월드컵이 네 인생 로드맵의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기 때문에 그 말에 수긍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꼭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네 진가를 보여 줄 무대는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당장 너의 예를 들더라도 지난 브레멘으로의 임대는 98년 월드컵 對 네덜란드전 16분 출전 때문이 아니었지 않은가 말이다.

    빤한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꼭 유럽이 아니면 어떠냐는 말은 하지 못한다.
    축구선수에겐 꿈의 무대, 그 무대를 밟고 정상을 향해 발돋움 하는 것이 어찌 소홀한 꿈이랴.
    너를 가까이 두고 보지 못함은 안타까운 일이겠으나, 영광의 무대에 선 너를 보는 것도 또한 가슴벅찬 일이리라.
    아직 우리에게 시간은 많고, 기회는 더더욱 많으니 괜찮다.
    새옹지마라니, 절망에 빠져 있을 필요는 없다.
    신이 네게 주려고 예비해 둔 더 큰 영광을 위한 잠깐의 시련이라 믿고 다시 힘을 내라.



    언젠가 기사에서 
    지난 2002년, 전국이 월드컵의 열기로 가득 차 있던 그 날들에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함을 인정할 수 없어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특히 TV로도 단 한 경기조차 볼 수 없었다는 너의 얘기에 나는 너를 책망할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리 여리느냐고.
    경기장에서의 너는 분명 건장한 사내건만, 왜 마음이 그리 여리느냐고 말이다.

    4년이 지난 지금, 공교롭게도 너는 또다시 월드컵이 열리는 나라에서 네가 없는 월드컵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절대로 숨거나 피해서는 안된다.
    네게 닥친 운명을 받아 들이고 할 수 있는 한 담대해져라.
    남자가 되어라.
    이 정도 시련쯤은 아무것도 아님을 증명해내라.
    정 울부짖으려거든 고작 이것 밖에 안 되느냐고 외쳐라.
    너를 쓰러뜨리려면, 이 정도로는 아직 십년은 멀었다고 외쳐라.



    이제사 고백하건데, 내가 너를 지지하는 이유가 역경을 딛고 일어선 너의 인생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고백한다.
    절망의 바닥에서 일어선 너를 보며 나는 삶의 희망을 얻고 위안을 얻곤했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나도 당당히 꿈을 위해 자리를 떨치고 일어 서는 날이 오게 될거라 믿으면서.
    그래, 아마 그랬으리라.

    어쩌면 나는 너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 있던지도 모른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 나는 잊고 살 뿐인 꿈을 너를 통해 찾아 내고 있던 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하루 하루 꿈을 잃고 늙어 갈 뿐이지만, 
    뭇 사람들의 멸시와 손가락질 속에서도 한발 또 한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너를 보며 힘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네게 고맙고 또 미안하다.
    네가 오욕의 날을 보내고 있던 즈음, 네게 어떤 힘도 되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이제 네게 다시 시련이 다가왔는데도, 너를 지지한다는 내가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미안함에 미안함을 더한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네 외로운 싸움이 맺은 과실을 취하기만 할 내 모습이 더욱 미안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몇번이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네 이름을 더럽히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네가 네 최선을 다하는 한 언제고 나는 너를 지지할 것이다.
    내게는 이 다짐을 지켜나갈 의무가 있다.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수 없기에, 언젠가 너와 내가 노쇠해져 가고
    지난 시간들이 빛 바랜 영광이 되어 버릴 지라도 너를 잊지 않겠노라는 다짐까지 말이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데, 너는 이런 나의 다짐이 치기어린 생각이 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

    언젠가 나는, 내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이 아버지만큼이나 멋지게 인생을 살아간 한 남자가 있었노라고.
    그리고 그 남자가 있어 이 아버지는 무척 행복했었노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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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멀리하던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차피 인생은 그런 것이어서, 네 외로운 투쟁에 동참할 수 없는 나는 담배를 피워 무는 일 외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그 고독한 싸움이 자꾸만 비정하게 느껴져 공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어차피 그 공허함이 담배로 채워질 리 없건만, 나는 또 빼어 물고 있어.
    하지만 괜찮아.
    비록 오늘은 이렇게 비탄에 잠겨 있을지라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는 법이 아닌가.
    괜찮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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