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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걱정이다.
    쉼을 위한 이야기/책 2005. 3. 28. 14:37

    오늘 볼 만한 영화가 없나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몇편의 시놉시스를 읽게 됐다.


    그 중 "밀애"란 제목을 가진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게 됐는데, 그 스토리며 상황설정에 구역질을 느꼈다.


    그러다 아주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는데..
    "전경린".
    나는 저 작가가 쓴 글을 한번도 읽어 본 적이 없지만, 최근 그 이름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밀애" 란 영화는 그 작가의 "내 생애 꼭 하루 뿐인 특별한 날" 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제목은 참 예쁘다.
    내 생애 꼭 하루 뿐인 특별한 날이라니...
    하지만 그 책의 메인 스토리가 불륜과 이혼이라니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분명 전경린이라는 작가가 삼류 야설 작가가 아닐테니 저 소설의 주제가 불륜과 이혼 뿐은 아니겠지만..


    혹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자유인가?
    그렇다면 하필 왜 그 자유가 불륜과 이혼이라는 코드로 표현되어져야 했는가?
    꼭 하루 뿐인 특별한 그 자아를 찾는 방법이 개방된 - 난잡한 -  성 뿐이었던가?
    그러다 "전경린"이란 검색어에 의한 검색결과로 한 인터넷 신문 기사를 읽게 됐다.
    최근 한국소설의 주류가 불륜과 이혼이라나?
    그리고 그 선두에 전경린이 서 있단다.
    거 참, 대단하다 해야 할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출판 역시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다는 얘기인데..
    불륜과 이혼, 그 극단적인 코드에 공감하는 독자가 그만큼 많다는 얘기겠다.
    두쌍 중 한쌍이 이혼한다는 세태 속에서 안타깝다 해야 하나, 당연하다 해야 하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내 생애 하루..."의 일부를 발췌해 올린 블로그의 게시물을 보았다.
    글 잘 쓴다는 작가답게 글이 참 윤택하더라. 그래, 윤택하더라.
    그런데 구역질이 났다.
    아마 내 선입견과 편견때문이리라.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구역질이 나더라.


    그 윤택한 글이 흔들리는 믿음을 정당화 하고 아름답지 못한 사랑을 아름답게 교묘히 위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결코 맘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작가의 글을 많이 읽은, 또 즐겨 읽는 듯 하던 어떤 사람을 기억하곤 무척 마음이 안 좋았다.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위험할 지 모르지만,
    시놉시스만을 읽고 난 후의 나의 소견으로는..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이 과연 "일탈"과 "방종" 이어야 할까?
    여성의 욕망의 틀을 깬다 하는데, 그렇다면 여성의 욕망은 그저 성적욕망일 뿐이더란 말인가?
    우리네 가족관이 성을 억압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방종이라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성적욕망 보다는 절제하는 삶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나 뿐인가?


    역사를 무대로 한 소설을 좋아하는 나는, 황진이란 이름의 책을 알게 되고 한때 읽고 싶다고 생각이 들 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책도 전경린이 썼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으로선 글쎄...
    조선이란 무대에서의 억압된 여성.
    자유로운 여성이라 일컬어 지는 황진이.
    그리고 전경린.
    내 선입견은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어 결국 그 책도 뻔한 그녀만의 결론을 낼 거라 예단해 낸다.
    그리고 결코 유쾌하지 않을 그 소설을 나는 읽을 생각이 없다.


    꽉 막힌 나로서는 전경린이란 작가가 그저 난잡한 성을 말하고자 그 책을 썼을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극단적인 페미니즘으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럴리 없다고 믿고 싶다.
    그럼 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와 자아로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녀는 그런 글을 써야만 하는가?
    무엇 때문에 "그녀"는 그런 글을 읽어야만 했는가?


    나는 일본영화를 싫어한다.
    그 이유는 그들 영화에 보이는 상황설정이 구역질 나기 때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참으로 난잡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들의 영화에서 감동과 열정을 느끼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의 극도의 잔인함과 지저분한 사랑, 극악의 광기,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의 "미학"이 난 딱 질색이다.
    흔히들 천재라 말하는 기타노 타케시에게 극렬히 묻어 나는 짙은 허무가 나를 휘청이게 만든다.
    너무도 일본적인 것들이 당연하게도 너무도 자연스레 묻어나는 그네들의 영화가 불편하고 그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


    그런데 요즘 그것들을 외래문화 뿐 아니라 우리네 문화에서도 보게 된다.
    위선일 뿐이라 욕할지 모르겠지만, 저런 것은 보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마치 올드보이를 보고 난 후 처럼 참 씁쓸하다.


    파격이라는 것.
    기존의 관념을 깬다는 것.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때론 바람직하고 장려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저 관념을 깨기 위한 파격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건 그저 사회적 약속을 위반한 행위일 뿐이며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야 할 사회를 어둠으로 끌어내는 공해일 뿐이다.
    정반합의 원리를 끌어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문제제기로 받아 들이면 좀 편해질까?
    그런데 내가 안타까워 하는 것은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바람직한 어떤 것"으로 포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상업과 연계되어 특히 더 그렇다.
    만든 영화 더 많이 보게 해야 한다. 만든 책 더 많이 읽게 해야 한다.
    센세이션을 일으켜야 하고, 그게 새로운 주류가 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자본의 논리이다.
    그리고 빗나간 자극은 사람들을 쉽게 파고든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문화평론가도 아니고, 사회운동가도 아닌 내가 이렇게 열을 내는 것은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염려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부분도 얼마간 혀끝을 차게 만들지만, 그것이 맘 속에 불안함을 가져 오는 절대적인 요인은 아니다.


    내가 걱정스러운 것은 내가 아는 어떤 소중한 사람 때문이다.
    그의 사고방식이, 그리고 그의 인생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있을까봐 두렵다.
    나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일까 두렵다.
    채찍질해 달리는 나의 극단과 우려가 빗나간 것이기만을 바란다.


    머리나 좀 식힐까 하고 영화를 뒤적거리던 중 예기치 못하게 전경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머리를 식히기는 커녕 더 아파온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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