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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실수해도 괜찮다는 걸 배워야 합니다.
    세상 사는 이야기/시사人Kunner 2011. 4. 20. 03:06



    이 글은...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에 부쳐

    먼저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에 대해 깊이 애도합니다. 그들이 내린 극단적 선택을 지지할 수는 없지만,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을 지독한 외로움을 생각하면 그저 애통한 마음입니다. 그 외로운 마음들에 한번도 손 내밀어 준 적 없는 사회의 일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미안합니다. 그럼에도 마음만 가득할 뿐,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어 빈 주먹만 움켜 쥐어야 하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간 참 보고 싶지 않은 뉴스였습니다. 기사를 열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괴로워질 것 같아서 일부러라도 외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어떤 학생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고, 늘 있던 그런 일들 중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 그 학생이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입학했던 공고 졸업생이었다는 얘기를 얼핏 듣고는..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이 낙오하고 마는, 그저 그런 뉴스구나 하고 말았습니다. 역시나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때로 삶은 지나치게 고단한지라, 기왕이면 즐겁고 유쾌한 뉴스를 보고 싶은데 '사람이 자살로 죽었다' 하는 류의 보고나면 뻔히 우울해 질 이야기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두어번의 죽음이 더 있었습니다. 이거 얼마 전에 나왔던 뉴스 아니야? 하는 데자뷰 아닌 데자뷰를 느끼면서도 '허, 거참 문제 있네' 하고 마는게 전부였습니다. 적어도 네번째 학생의 죽음으로 전 사회가 시끄러워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솔직히 그 후로도 뉴스 기사를 섭렵한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것들이 문제다 하는 정도만 알 정도로 몇개의 분석 기사를 읽은 것이 전부니까요. 격해진 감정으로 다룰 이슈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은 꼭 제가 아니어도 다들 하고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수많은 방관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 이상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 이렇게 안타까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실수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이 자살을 선택하게 된 일차적 원인은 아마도 경쟁에서의 뒤쳐짐, 낙오와 그에 대한 자괴감 - 자존감의 상실 때문일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터 줄곧 영재니 천재니 소리 들으며, 한번도 실패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경쟁에서 뒤처졌다는 것, 낙오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 패배자인 자신을 인정해야 할 때 감당하기 힘든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게 되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그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의견을 냈고, 그런 주장을 담은 기사들이 많이 있으니 굳이 출처를 밝히거나 첨언을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영어 수업에 대한 폐해나 전공수업위주의 커리큘럼 등에 대해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경쟁에서 밀렸다고 자살을 선택하는 나약한 심성이 문제라고요. 

    그렇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실수하는 법을,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배운 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저는 카이스트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카이스트 학생들을 한번도 본 적도 없고, 카이스트를 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처럼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엘리트가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이렇게 애끓는 심정으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게 비단 카이스트 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얘기는 다시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운 실수는 곧 실패고, 패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는 돌이킬 수 없는 낙오로 이어질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위인이 되라고 가르치지만, 미국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훌륭한 시민이 되라고 가르칠 뿐이다. 모두가 위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훌륭한 시민 가운데서 위인이 나올 수는 있다. 이것이 미국과 한국의 차이이다."

    이는 얼마 전 어떤 뉴스 기사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이번 카이스트 사태에 대한 뉴스 기사였을텐데,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략 저런 뉘앙스의 이야기였습니다.

    위의 얘기에서처럼 우리는 어렸을 때 부터 '위인'이 되라고 배웁니다. 우리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씁쓸한 이야기가 유행어가 되는 그런 세상에서 자라왔습니다. 그러나 1등이 되라고 배웠다고해서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극히 일부만이 저마다의 분야에서 1등이 될 수 있으며, 나머지 절대다수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상실감과 패배감, 열등감을 겪으며 자라게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승자독식의 사회

    위에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실수해도 괜찮다는 걸 배워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매번 무한경쟁이었고, 그 경쟁의 결과는 항상 지나치게 무거운 무게로 우리의 삶을 규정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이라는 것은 현재 너희들의 수준을 가늠하는 수단일 뿐이다. 스스로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자신이 부족함을 깨달아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중학교 쯤 올라가면 선생님들은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시험은 곧 전쟁입니다. 시험에는 '일렬로 줄세우기' 외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중간고사, 기말고사와 같은 시험들은 그 하나 하나가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단 한 차례의 수능시험으로 인생이 달라집니다. 재수, 삼수를 하면 되니 기회는 여러 번 있는 것 아니냐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 치르는 시험 성적 - 그것도 1년에 한번 치르는 - 으로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19살에 의대에 진학한다면 그 인생은 이미 반 이상 성공한 셈입니다. 스무 살이 채 안 됐으니 기대 수명의 반의 반도 안 살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재수, 삼수 아니라 뭘 해서라도 갈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들 의대를 갈 수는 없죠. 또 다들 명문대에 진학할 수도 없습니다. 절대 다수는 이미 낙오의 대열에 있습니다. 대학 입시라는 관문을 잘 넘지 못하면, 거기서부터 계층이 갈리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직장의 제한은 물론, 만나는 사람의 부류 까지도 이 시점에서 나뉘게 됩니다. 사회적 계층이라고 하지요. 요즘은 이런 것들이 결정되는 시점이 점점 더 일러져서, 고등학교도 아니고 중학교 입시에조차 그렇게 야단이라고들 하지요?

    아무튼 그렇게 계층이 나뉘면, 어지간해서는 그걸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연히 학생들은 저마다 스펙 쌓기에 올인하게 됩니다. 뒤늦게라도 따라잡아서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그대로 끝이니까요. 이제 한번 뒤처지면 다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걸 다들 아는 겁니다. 하지만 일렬로 줄세우다보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낙오하고 도태하는 사람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인생은 별볼일 없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우리네 사회란 것이 당장 취업이란 첫 단추를 잘 꿰지 못 하면 그 다음 단추도, 그 다음 단추도 잘 꿸 수 없는 구조니까요.

    애초에 이런 성공과 실패의 간극을 좁히거나 역전 시킬 수 있는 것은 아주 극소수의 선택받은 아이들 뿐입니다. 집에 돈이 많거나, 우연히 어떤 특별한 기회를 잡았거나 하는 경우 말입니다. 나머지 절대 다수는 평생을 노력해도 그 격차를 줄이기가 힘듭니다. 매우 보수적으로 말해 '줄이기가 힘든' 것이지, 사실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음은 굳이 자료를 들이 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 사회가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얘기를 돌려, 카이스트 학생들이라면 이미 사회적 성공에 매우 근접한 사람들입니다. 성공에 근접한만큼, 그들은 성공의 반대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 그리고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것들을 놓치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에게 실패란 있을 수 없는 단어입니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것을 배운 적도 없습니다. 

    이건 꼭 카이스트 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죠.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가진 것을 잃지 않으려 필사적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그나마 가진 것마저도 다 빼앗겨야 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경쟁에서의 낙오로 인한 자살은 비단 카이스트 학생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번에 카이스트의 자살이 특히 이슈가 되었을 뿐, 이런 일은 이미 여타 학교에서도 빈번하게 있는 일들입니다. 

    일부 그런 사람들도 있긴 하겠지만, 자살한 학생들 모두가 특별히 예민하고 정신적으로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실패를 용인하지도 않고, 실패한 사람들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지도 않습니다. 한번 실패하면 그대로 끝입니다. 그들은 그 끝에 좀 더 빨리 다다랐을 뿐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해서는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아주 가끔 '실패는 성공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고 배우기도 합니다만, 성공에 대한 전 사회적 강압에 의해 이내 잊혀지고 맙니다. 물론 간혹 재수, 삼수와 같이 재도전의 기회가 있기도 합니다만 극히 특수한 경우의 예일 뿐 대체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재도전의 대가는 무척 가혹합니다. 카이스트만 '징벌적 등록금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제도가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다니고 있는 일반 대학교에서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학점을 '리모델링' 합니다. 학점관리를 위해 이미 들은 수업도 학점이 좋지 않으면 '지워' 버립니다. 1년에 천만원을 육박하는 대학교 등록금을 감안하면, 그리고 대학 생활에 필요한 부대 비용까지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이미 '징벌적 등록금제'를 적용받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그야말로 무한경쟁이자, 이긴 사람이 모든 것을 갖는 '승자독식'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청년실업문제에 두고 "눈높이를 낮춰라"고 말해서 한때 화제가 됐었습니다. 그 얘기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단추를 잘못 꿰면 그 다음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아래 계층으로 내려가면 위로 올라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나 하는 소리일까요? 중소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대기업으로 이직한다니, 그런 빈도가 얼마나 되는지 관련 통계가 있으면 한번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근 10여년을 중소기업에서 일했고, 그 과정에서 관공서와 대기업과 여러번 일을 했지만 그런 케이스에 대해서는 한번도 들어 본 일이 없습니다. 다만, 계약직으로 옮겨 갔다는 얘기는 몇번 들었습니다. 중소기업 때보다 못한 연봉과 대우를 감수한 채 2년 계약직으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렇게 해서라도 '을'이 아닌 '갑'에 서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번 '을'이 되면, '병', '정'은 되기 쉬워도 '갑'이 되기는 너무너무 어려운게 우리 사회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눈높이를 낮추라고요? 그런 말을 하려면, 계층 간 이동이 활발한 사회를 만들어 주든지, 아니면 계층의 분화로 인한 차이가 너무 크지 않도록 조정을 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얘기가 여기까지 오면 또 "우리 때는 보릿고개가 있었는데, 끼니 다 챙겨먹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 지 아는가?" 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다 굶을 때 함께 한끼 굶는 것과 모두가 다 끼니 걱정안 하고 살 때 한 끼 굶는 것은 같은 한 끼 굶는 것이라도 받아 들이는 차이는 엄청나게 됩니다. 이런 기본적인 심리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나온 얘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고요?

    교수님께서는 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꼭 대학을 나와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경쟁이 부당하다고 느끼면 왜 거부하지 못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싫으면 중퇴하면 되잖아?" 하셨습니다.

    일단 우리 사회에서 중퇴라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오는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얘기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대학 중퇴자 중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로 빌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를 뽑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단락에서 하기로 하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대학의 나아갈 길을 얘기하면서 진리탐구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실상 대학은 직업 훈련소, 자격증 장사치가 된지 오래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강요하는 그런 대학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과연 누가 만들었습니까?
    어린 학생들인가요? 아니면 기성세대들인가요?
    누가 아이들에게 높은 평점의 학점을 요구하고, 높은 토익점수와 각종 자격증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아이들이 공명심에 취해 벌이는 일들입니까? 아니면 기성세대들이 가혹한 경쟁의 장으로 아이들을 밀어 넣은 것입니까?

    지난 해 고려대에서 김예슬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쓴 대자보가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변질된 대학을 거부한다는 김예슬 선언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잠깐 이슈가 되는가 했지만, 이내 묻혀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교수님들이 어떤 집단행동을 했다거나, 개인적인 의사 표명이라도 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익명의 교수님이 한 두 명 인터뷰 했다는 얘기는 들어 봤습니다만, 그 정도 얘기를 익명으로 해야 할 정도라면 더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김예슬이 거부한 대학은 교수님들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시대의 지성이자 살아있는 양심이어야 할 교수님들께서 어떻게 단 한분도 김예슬의 이야기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인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을 상대로 일렬로 줄세우기, 무한 경쟁으로 몰아 넣기, 스펙 장사, 자격증 장사하기를 하는 것은 아이들 자신이 아닙니다. 바로 대학과 교수님들입니다. 그런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왜 거부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비단 교수님의 말씀만 놓고 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예슬 선언에 대해 단 한분의 교수님도 공개적인 의견 표명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만나 본 교수님들 치고 학생 탓 않는 분은 한 분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수님들이 그러십니다.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고요. 그럼 반대로 여쭙고 싶습니다. 왜 교수님들은 반대하지 않으십니까? 왜 교수님들은 이런 저급한 대학교육에 맞서지 못하고 스스로 직업 훈련사가 되려 하십니까? 교수님들 정도면 다들 기득권을 가지신 분들 아닙니까? 이미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많은 것들을 이루신 분들께서도 못 하는 것을,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아이들에게 책임을 미루십니까?




    이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빌게이츠도 대학 중퇴였다, 왜 포부를 크게 갖지 못하느냐" 라고도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빌게이츠 같은 사람 나와야지 않겠느냐"고요.

    각 개인이 야심찬 포부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젊은이가 이렇다할 포부도 없이 그저 눈앞의 현실에만 급급해 있다면 개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사회 시스템 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서 모를 뿐, 세상에는 한 명의 빌게이츠와 수백만의 실패자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과연 수백만의 실패자를 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실패한 사람들에게 주홍글씨를 찍는 것은 물론, 패자 부활의 기회도 거의 주지 않습니다. 또 모르겠습니다. 이재용이 뭔가를 이뤄냈다는 얘기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삼성의 차기 수장으로 거론되니 이쯤되면 패자부활이 아니라 패자가 곧 승자인 듯 합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특별한 케이스일 뿐, 일반적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빌게이츠가 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면 쓸모없이 스펙경쟁만 시키는 대학을 그만 두고 창업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고졸에게 허락된 일자리는 뻔하니 창업밖에는 할 게 없습니다. 

    하지만 창업을 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벤처업계에서는 설립 후 1년 안에 절반이 망하고, 5년 안에 90%가 망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10년 안에는 단 1%가 남는다고들 하죠. 물론 창업을 하려면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걸 목표로 해야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목표한대로 다 되는게 세상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만약 실패하기라도 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창업에 대한 지원책이 별로 없는 나라에서, 집에 돈 좀 있지 않은 이상 뭔가 창업을 하려면 개인 빚을 끌어다 써야하는데, 그렇게 빚 잔뜩 끌어 쓴 마당에 망하기라도 하면 한순간에 신용불량자가 됩니다. 그야말로 한방에 모든 걸 잃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성공을 위해 무언가에 All-in 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하지만 그 All-in으로 한순간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면 그 다음은 누가 책임질까요? 우리의 사회보장제도가 그렇게 잘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실패는 책임지지 않으면서 포부를 크게 가지지 못했다고 책망한다면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또 그러실 겁니다. 그렇게 실패가 두려워서 무얼 하겠느냐고. 아마 또 그러시겠죠.
    '우리 젊었을 때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하지만 냉정하게 놓고 봤을 때, 80년대 호황기와 지금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부의 편재가 날로 심해져가고 기득권의 고착이 날로 공고해져가는 상황에서 그때와 똑같이 당찬 포부 하나로 뛰어 들라 하는 것은 시대착오에 지나지 않습니다.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될 뿐입니다. 개중에는 풍차에서 멋진 공주님을 발견할 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돌아 오는 것은 평생을 다 갚아도 못 갚을 무거운 빚과 신용불량이라는 낙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실패한 젊은 창업자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많다고 합니다. 그들이 실패를 통해 얻은 경험을 성공의 밀알로 삼겠다는 취지라고 합니다. 부정부패로 몰락한 기업에 대해서는 용서하지 않지만, 그 외의 사업 상 실패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기업을 일으켜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 최소한의 환경을 마련해주지도 않고, 성공도 실패도 다 개인의 몫이라고 등 떠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창업을 권한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나눠야 합니다.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창업하라고 등 떠밀어 놓고, 실패에 못이겨 한강 다리에 오르는건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이건 자살방조를 넘어 자살교사에 가깝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무책임한 등떠밀기로 젊은이들을 절망으로 밀어 넣어야겠습니까?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교수님 말씀에도 옳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실패가 입증된 공산주의를 답습할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의 경쟁은 미덕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은 편익보다 더 큰 비용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사회적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경쟁하라고만 외치는 것은 부당합니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어떻게 착취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식의 경쟁강요는 그만 두어야만 합니다.

    저는 생물학적 나이로는 88만원 세대가 아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88만원 세대와 함께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가지로 88만원 세대들과 처한 현실이 좀 다릅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느 면에서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당사자들에 비해서도 그렇고, 연배가 높으신 기성세대들에 비해서도 그렇고.. 또 제 나이 또래의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도 그렇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그들을 보면 등을 두드려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 
    "괜찮아." 라고요.

    저도 다 배우지 못한, "실패해도 괜찮다"라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

    제가 아직 감히 그럴 수 없는 것은, 이 사회는 결코 실패해도 괜찮은 사회가 아니며, 그들이 실패했을 때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대단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중요한 원리를 꿰뚫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요즈음 젊은이들의 문제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또, 무언가를 비판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비판의 가장 밑바탕에는 대상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 그들이 겪어야 할 괴로움은 외면한 채 감내하지 못한 나약함만을 지적하는 것은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더러 문제 해결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하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아직 그 구체적인 방법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과연 가능한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금으로써는..
    '다시 일어설 수만 있다면, 실패해도 괜찮다는 걸 가르치는 것' - 그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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