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er from Kunner2011.02.04 02:57
언젠가 SLR클럽 소미동의 어떤 사람이 어머니가 DSLR을 잘 다룬다는 얘길 듣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사진 찍으러 다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그래서 산도 잘 타고 여행도 자주 다녀서 몹시 건강하다고..
실제로 사진 속의 그 아주머니는 몹시 건강해 보였고, 즐거워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연배인 것 같던데 시간만 나면 뒹굴뒹굴 누워 TV만 보는 우리 엄마와 참 비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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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얘기를 꺼내봤다.

"엄마, 카메라 사 드릴께 한번 사진 찍어 볼래?"

그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가 하는 말, 

"네 꺼처럼 크고 복잡한거 말고, 그냥 누르면 찍히는거 있지. 작은 거"

뭐랄까..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사진기에 열심인걸 보면서 엄마도 카메라가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간 왜 몰랐을까?


하지만 '정말 하긴 하려나? 곧 시들해 질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사실.. 그동안 엄마가 뭐 해 보겠다고 해서 사줬다가 실패한게 한 둘이어야지..
처음 사서 며칠 갖고 놀다 시들해져서 먼지만 잔뜩 뒤집어 쓴게 한 두개냔 말이다.

그러니 신뢰가 안 들고 반신반의 할 밖에..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싼 중고 - 그렇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봐줄만한 카메라를 사자는 것이었다.
그 날부터 네이버 중고장터를 드락거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틈틈히 장터링을 하면서 - 마치 매가 먹이감을 노리듯 그렇게 빙글빙글 중고장터를 돌았다.

그리고 오늘, 결국 적당한 물건을 발견하고 거래를 성사시켰다.

원래 장터에서 거래되던 가격의 절반 정도에 나와 있는 매물을 본 것이다.
물론 구성품이 좀 빈약하긴 하지만 어차피 그런 구성품 따위(박스나 매뉴얼, 충전기 등) 엄마한텐 별로 필요하지도 않다.
쓸데없는 구성품 없이 카메라를 싸게 사니 그걸로 된거다.

나는야 거상(巨商) 길건호. 깔깔깔



바로 이 녀석이다.
샘숭 VLUU L100 이란 모델.
정말 작고 가볍다. 엄마가 쓰기엔 이 정도면 딱 좋을 것 같다.
잠깐 만져본 바로 나보고 쓰라 그러면 줘도 안 가질 것 같지만.. -_-;;;;

더구나 샘숭 제품 - 신품을 사는 거였다면 죽어도 안 샀겠지만 중고, 그것도 떨이에 가까운 중고 제품이라 샘숭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은 아니므로 거리낌 없이 샀다. 

하지만 아무리 싸게 샀다 그래도 역시 샘숭. 제품에 대한 만족도 따위 있을리 없다.
메뉴 인터페이스도 개판인데다, 촬영 설정은 왜 껐다 켤 때 마다 초기화 인거냐?
되도 않는 플래시는 강제발광이 기본이라 매번 수동으로 꺼줘야 하고, 화면모드도 껐다 켤 때 마다 초기화.
날짜와 시간이 리셋되지 않는 걸로 보아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설계가 그 따위인거다.
역시 샘숭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에휴..

잘 하는 건 그저 비자금 조성, 편법 승계 따위 일테지.


하지만 나를 골머리 아프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누르면 찍히는 샘숭 카메라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한테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는 법을 가르쳐 주다가 수명이 십년 쯤은 줄어 버린 것 같다.
완전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속이 다 벌렁벌렁할 정도로 ㅠㅠ


사진에 있는 파일을 엄마 컴퓨터로 옮기는 걸 가르치다 화병으로 쓰러질 뻔 했다.
나도 죽겠지만, 아마 당사자도 죽을 노릇이었을거다. 


수많은 실습과 자체 매뉴얼 제작, 그 눈물나는 흔적들.

훈련 과정의 각 단계를 상세히 적어 매뉴얼로 만들어, 엄청난 횟수의 훈련을 반복했다.
카메라를 컴퓨터로 연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사진을 컴퓨터의 정해진 폴더에 옮겨 감상하는 것 까지, 총 6개의 장으로 이뤄진 매뉴얼을 한 줄 읽고, 한 번 따라하고, 한 줄 읽고 한번 따라하도록 했다.

아아, 내 속은 이미 까맣게 타들어갔다. ㅠㅠ


남은 휴일 동안 엄마에게 내가 가진 카메라 지식을 다 알려 주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진을 찍고,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옮겨와 확인하는 것 정도는 확실히 할 수 있도록 해 볼 생각이다. 이미 까맣게 타들어 간 내 속이 몇번은 더 숯이 되어야겠지 ㅠㅠ

좋은 일 하는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해 보지만 힘들다 못해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ㄷㄷㄷ
사진 찍고 컴퓨터로 옮기는 일이 능숙해지면 이메일로 사진 보내는 것도 한번 해 보자고 했는데..
과연 그 날이 오긴 하려나  ( --)a


흑..
얼른 엄마가 교육 효과를 팍팍 보여줘서 이 답답하고 짜증스런 맘이 흐뭇함으로 바뀌게 해 줬으면 좋겠다.
아울러 제발 이번엔 작심삼일 말고 삼년은 가기를..

저 샘숭 카메라 따윈 줘도 안 가질거라서 엄마가 안 쓰면 고스란히 돈 낭비란 말이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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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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