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부익부빈익빈으로 일컬어지는 양극화 - 혹자는 이런 양극화가 IMF의 어두운 터널을 넘어 오는 과정에서 부상한 사회문제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양극화가 처음 이슈가 된 것은 지난 참여정부 때의 일로, 참여정부 내에서 주요한 정책 과제로 다뤄졌으나 오히려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사실 양극화는 어제 오늘의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원시공산사회에서라면 모를까 유사 이래 양극화는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해왔다. 애초에 세상은 공평한 곳이 아니며, 사람은 천성이 이기적이어서 애초에 공평한 존재가 아니다. 한 명이 케이크를 자르고, 다른 한명이 먼저 케이크를 고르게 할 때 케이크는 가장 공평하게 나눌 수 있다는 말은 괜한 얘기가 아닌 것이다. 단순히 한번 먹을 케이크를 자를 때도 이러한데, 하물며 개인의 삶 - 후대에까지 자자손손 영향을 미칠 부를 나누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 말해 무엇 하랴. 더구나 이런 분배는 개인과 개인이 케이크를 나눌 때처럼 서로가 눈 부릅뜨고 감시하고 지킬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세상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하며, 무수한 관계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불공평이란 본질적으로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극화를 인간의 자연스러운 속성으로 보고 그대로 둬야 옳은가?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 사회이기 때문에, 누구나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가져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원칙은 구호로만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미 서구 사회에 도입된 지 수백 년이 지나 십 수 세대가 대를 물려 재산을 불려 왔다. 기회의 평등을 말하고는 있지만, 공정한 경쟁이라기엔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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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경우도 근대화를 거쳐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에 침투한지 몇 세대가 지났다. 우리의 경제 발전 역사에는 자수성가의 위대한 표본으로 거론되는 입지전적인 사람도 많이 나왔고, 이런 사람들의 일대기를 통해 자본주의란 참 바람직한 것, 희망적인 것, 누구에게나 기회가 보장된 공평한 것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일견 맞는 이야기다. 현대 신화를 일으킨 고 정주영 씨 같은 경우를 보면, 어느 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거대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딱 한 세대만 더 밑으로 내려가 보면, 이런 평가를 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 아들 세대들을 보면, 여타의 사람들에 비해 아비를 잘 만난 것 외에 달리 어떤 위대함이 그들에게 있는지 궁금해진다. 어렸을 때부터 제왕수업을 받았다는 것이 그들의 장점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간 이 땅의 동년배들이 당장 끼니를 마련하느라 분주하던 때에 제왕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 자체가 이미 공평한 출발선과는 한참의 거리가 있다. 이는 현대 뿐 아니라 삼성, LG 등 다른 대부분의 세습 재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점인데, 세대를 거듭해 내려갈수록 더욱 심각해진다. 얼마 전 뉴스에 우리나라 주식 10대 재벌 운운하며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씨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나이 마흔을 갓 넘긴 그가 주식 10대 부자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 과연 그의 탁월한 투자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얘기를 이 정도까지만 하면, 이건 누가 더 많은 부를 가졌느냐에 관한 이야기일 뿐 딱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적 소유가 허용된 인간 사회에서 부가 세습되는 것은 당연하고, 이런 부의 세습은 또 한편으로 인간이 열심히 피땀 흘려 일하는 동력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부의 세습은 장려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부의 세습이 사회 전체의 부의 증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지난 세기의 소비에트 실험으로 이미 여실히 증명되었다. 그렇다, 이것은 반박할 이유가 없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야기가 딱 여기까지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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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도 존재한다. 저 위에서 거론한 정용진이나 이재용, 정의선 같은 사람들과는 달리 당장 끼니를 마련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몸을 놀려야 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렇게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사는데도, 아니 그렇게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지도 못하고 노후도 대비하지 못한 채 평생을 ‘구르다’ 만년에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비통한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건 도의상으로도,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현대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이념에 비추어 봐도 안 될 일이다. 어떤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당장 끼니 걱정하느라 그 능력을 발현해보지도 못하고, 아니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건 - 그 자체로 국가적, 전인류적 손실이 아닌가? 덧붙여, 이 나라 윗세대들은 모두 다 함께 잘 살아 보자고, 가난한 나라 한번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고난과 역경을 함께 헤쳐 온 사람들이다. 그 중 절대다수는 우리 경제 발전사에서 온갖 부조리와 부당한 착취를 당하며 땀 흘려 노력한 대가가 엉뚱한 데로 옮겨가는 것을 보고도 오직 국가의 발전이라는 대명제 앞에 희생만을 강요받았던 사람들이다.

진짜 문제는
부의 세습이 아니라 세습된 부의 정당성일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인간의 태생적 불공정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최소한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는 세상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부의 정당성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 우리 경제 발전사에서 재벌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는 화두다. 그런데 과연 이 재벌의 형성이 오로지 총수의 영민함과 결단력, 그리고 총수 개인의 운()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정책금융(관치금융), 대마불사 논리에 의한 몰아주기 등 정경유착의 결과이자 절대 다수의 희생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가? 더구나 이 나라 부자와 기득권층들 중 절대 다수가 친일세력의 잔당이거나 과거 군사정부에서 흘러나온 부동산 개발 관련 뉴스로 일거에 돈방석에 오른 졸부들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이 이럴 진데 그 부의 정당성을 말하고, 그 부의 세습이 정당함을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런 얘기에 대해
이제 와서 그걸 다시 뺏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미 일어난 불공정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소유를 - 설령 그게 부당한 소유라 해도 - 강제로 조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다. 철저히 기득권 편향의 논리에 불과하지만, 안타깝게도 극단적인 형태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현재의 소유 구조를 변경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 이런 강제 배분으로 해결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사실이다. 친일의 대가로 형성된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것도 사실 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 살아 있는 권력으로부터 형성된 부의 재조정의 어려움은 오죽할까. 애석하지만 냉정히 말해 지난 부의 편성에 대해 재조정을 하기엔 힘이 벅찬 것이 사실이다.


무자비한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온 사회를 휩쓸고 있다
.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명목으로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고, 고용을 통한 생존을 담보로 한 가진 자의 횡포는 노동자를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도록 한다. 고용관계에서 시작된 가진 자의 가지지 못한 자에 대한 착취는 사회 전 부문으로 끝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개인이 이런 착취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아예 사회에서 이탈하거나, 아니면 철저한 빈곤을 각오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보통의 경우 아예 불가능한 일일 뿐이다. 이런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우파적 관점은 모두 낭만주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세대는 전쟁이나 혁명이 발발한 세대에 한해서일뿐이다. 한번 부가 형성되면, 딱 한 세대만 지나가도 사회를 더 이상 헤어날 수 없는 자본에 의한 착취라는 부조리에 빠뜨려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현물이 아닌 금융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더욱 심화된다. 금융세계에서는 현실세계와는 다르게 규모의 경제가 언제나 양의 방향으로, 기하급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진 자들과 그들의 논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점점 나아지고 있고, 이렇게 문명세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진보의 결과라고 말이다. 지금 이 세계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로 먹고 사는 것만도 감사한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인데 만약 모두가 자기 몫을 외쳤다면 지금 이런 사회적 부는 형성될 수 없었다고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만큼 틀린 말이기도 하다. 이들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 말이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사람이 불만을 느끼는 원인에 대해 주위 사람들과에 대한 비교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문제로 바꿔 말하면, 아무리 우리 개개인의 경제적 여건이 50년 전의 그것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우리의 비교 대상은 50년 전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여기 비정규직으로 하루하루 날품팔이 하면서, 간신히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런 사람에게 그래도 너는 하루 세끼는 먹지 않느냐고, 자신은 어렸을 적 보릿고개를 지날 때 하루에 한 끼도 못 먹고 피죽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면 감사한 줄 알아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봐야 헛소리일 뿐이다. 다 같이 굶주리며 보릿고개를 지나던 시절과 다이어트가 목적이 아닌 이상 하루 세끼 못 먹는 게 이상한 현 시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굶어 봐서 아는데...’ 하며 그 시대의 굶주림을 아무리 얘기해봐야 지금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영감도 주지 못한다. 같은 이유로 지구 반대편에 사는 소말리아 난민들의 이야기 역시 잠시 상심에 잠기게 할 수는 있어도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 및 한국은행의 연구에 따르면(한국은행 조사국 정후식, 『일본의 소득격차 현황과 시사점』 2010.2 한국개발연구원 김희삼,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 2009.12) 2000 년 후 들어 일본에서, 우리의 경우 2015년 이후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뚜렷하게 관측될 것이라고 한다. 또 가난은 교육기회의 불균형을 가지고 오고, 교육의 불균형은 사회적 지위의 불균형을 동반한다. 모두가 다 가난할 때와는 달리, 개인의 노력으로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이미 갔다는 것이다. 이런 가난의 대물림이 심각한 문제인 이유는 발전에 대한,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회는 생명력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회에 생명력을 불어 넣기 위해서는 희망을 불어 넣어야 한다. 희망은 아무리 용쓰고 노력해봐야 기득권이 짜 놓은 판 안에서 몸부림칠 뿐이라는 절망의 법칙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적어도 최소한의 먹고 사는 일, 교육, 건강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모두가 기회의 평등을 누리며 건강하게 경쟁할 때 비로소 희망은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게 된다.

당장 먹고 살기 팍팍한 고단한 삶에서는 가치에 대한 고민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고민은 엘리트적 소수가 하면 충분하다고 믿는 게 아니라면, 마땅히 우리는 이야기 해야 한다.

“이의 있습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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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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