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을 위한 이야기/사진
유르겐텔러 사진전 - touch me!
Kunner
2011. 6. 16. 21:56
초급보도사진제작 수업에서 기말고사 대체 레포트로 사진전 감상문을 써 오라 했다.
교수님께서 과제로 내 주신 두 사진전 모두 가보고 싶었지만, 유르겐 텔러의 사진을 과제의 화두로 삼고 싶었기에 이 사진전을 먼저 다녀왔다.
사실 과제의 대상을 결정하기 전, 인터넷으로 유르겐 텔러의 사진들을 보고 좀 의아했다.
대체 그의 사진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고, 왜 그의 사진이 그렇게 각광을 받고 있는지 쉽게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문난 집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그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그게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얼핏 보기에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사진들뿐이던데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말이다.
역시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얘기지만, 유르겐 텔러는 사진 촬영 시 특수 조명을 쓰지 않으며 별다른 후보정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작가라 칭송 받는 사람이니만큼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것은 아닐 테고, 당연히 뭔가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리플릿조차 너무나 심플했다. 밋밋하게 보일 정도로.
보통 다른 사진전의 리플릿들에서 강렬한 인상을 느낄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유르겐 텔러의 인사말과 함께 쇼핑백 조형물이 서 있다.
쇼핑백 조형물은 그가 광고 사진 작가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보다시피 조형물 뒤가 뚫려 있어 사람들이 안에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마치 빅토리아 베컴을 모델로 했던 MARC JACOBS 광고 사진을 떠올리게 된다.
(한번 찍어 보고 싶었으나 혼자 갔던지라 방법이 없었다. 흑…)
사진들은 2층과 3층에 나뉘어 전시되어 있었다.
먼저 3층으로 올라갔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2층을 먼저 보고 3층을 보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2층에서는 작가의 사상.. 이라면 좀 거창하고 스타일이나 의식 같은 것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3층에서는 이번 사진전의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작가의 스타일에 대해 좀 익힌 후 3층의 사진들을 보게 됐더라면 감흥이 좀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3층에 올라가자마자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작가의 지인들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참을 따라 읽어 내려갔는데, 무수한 질문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대답도 적혀 있지 않았는데, 애초에 어떤 결론을 도출해낸다기보다 다양한 화두를 이것저것 마구 던져 놓는 느낌이었다.
벽면을 지나 코너를 돌아서자 인터넷에서 봐왔던 유르겐 텔러의 사진들과는 사뭇 다른 사진이 하나 걸려 있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냥 사진 옆에 kitten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의 다른 사진들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이었다.
이게 그의 사진 세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넘어가고 다른 사진을 보기로 했다.
이제 막 관람을 시작했을 뿐이므로.
또 다시 코너를 돌아 사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사진에서 풍기는 몹시 기괴한 느낌에 기분이 나빠졌다.
분명 작가의 의도가 있으리라 하는 생각이 든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 사진을 보고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작가는 역시나 어떤 설명도 없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
이 사진의 제목은 ‘문어의 항문(octopussy)’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문어의 항문이 아니라 다른 것을 떠올린 것이다.
작가가 어떤 설명을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이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본 후 내린 결론도 아니다.
그저 그냥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순간, ‘아, 이게 작가의 노림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진을 찍은 것은 작가지만, 그를 해석하는 것은 관객 개개인이다.
그리고 개개인은 저마다의 배경 지식과 가치관, 감정 등을 통해 사진을 개인의 감상으로 체화한다.
결국 저 문어를 보고 혐오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그리고 문어와 전혀 관계가 없는 성(性)을 떠올리게 된 것은 사진 탓이 아니라 사진을 바라보는 나의 탓이리라.
혹시 작가는 이런 것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런 가정을 검증하기 위해 좀 더 사진을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유르겐 텔러의 사진 스타일에 적응을 다 못한 상태에서, 이 사진을 보니 슬슬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어떤 점에서 전시까지 될 만한 대단한 사진인가 싶어서 말이다.
사진 속 인물은 데이비드 호크니라고 한다.
검색해보니 유명한 팝아트 작가라고 하는데 현대예술엔 문외한이라 그의 존재에 대해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배경지식이 좀 있었다면 더 나은 해석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어 아쉽다.
어쨌든 자세히 보면 그의 몸 여기저기에 담뱃재가 흩어져있다.
카메라 앞에서 어떤 긴장도 없다. 그야말로 자유분방함.
그리고 완전한 휴식이다.
이것은 작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아무 생각 없이 스트로보를 번쩍 - 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사진 전반에 도는 붉은 끼는 피부 톤을 다 벌겋게 만들어 놓았다.
도무지 잘나가는 상업 작가가 찍은 인물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게다가 다른 사진들과 공통적으로 엮이는 주제도 없는 것 같다.
새끼 고양이에, 문어의 항문. 그리고 아무렇게나 누워있는 중년 사내의 모습 - 대체 뭘까, 작가의 의도는?
<유르겐 텔러의 사진 도록>
전시실 중간에는 그의 도록이 유리관에 진열되어 있었다.
유리관에 들어있어 마음대로 넘겨 볼 수 없는 것이 좀 아쉬웠지만, 펼쳐진 곳의 사진 몇 장으로도 매우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사진들에서 모델들은 대부분 나체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느낌들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똑같은 모델이 똑같이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어떤 사진에서는 무척 야한 느낌을 주지만, 또 어떤 사진에서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않기도 한다.
어떤 차이일까 싶어 좀 더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괜스레 주위 시선을 의식하느라 다른 사진들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대부분 여성들의 나신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중 또 다른 종류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가만 들여다보니 쓰레기통에 처박힌 개였다.
왜 저러고 있는 걸까 하고 자세히 보니, 사진의 제목이 ‘frozen dog’ 였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몹시 끔찍했다. 하지만 사진에서는 처절하거나 기괴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흑백 톤으로 인해 오히려 차분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개의 표정에서 고통이 아니라 평안을 보았다면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그 다음 코너로 도니 굉장히 유명한 사진이 걸려 있다.
패션이나 유행 같은 쪽엔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한번은 봤던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한 오디오 설명이 있어서 들어 보니, 작가는 모델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는데 제일의 가치를 두고 있다고 한다.
빅토리아 베컴은 그 자체로 소비되는 상품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그녀를 쇼핑백에 넣어 버렸다.
하지만 왜 쇼핑백에 그녀를 ‘구겨’ 넣었는지, 그것도 다리를 크게 벌린 채 뒤로 누워 있게 했는지 작가는 말하지 않았다.
쇼핑백에 들어가도 좋을 만큼 패션의 아이콘인 그녀이지만 고상하거나 우아한 느낌이 아니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그런 부정적인 뜻이 아니라 발랄하고 도발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극대화한 것뿐인가?
그게 어떤 점인지 모르겠지만, 빅토리아 베컴을 축구 선수 베컴의 아내 정도로만 인식하는 나는,
그리고 언젠가 베컴의 부인이 참 극성맞아 베컴이 기를 못 펴고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쩐지 이 사진이 그녀를 표현하는데 있어 매우 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사진의 이름은 사진전의 이름과 같은 ‘touch me’ 이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대체 뭔가 싶어서.
보통 다른 사진전들을 가 보면 전시된 사진들은 하나같이 다 잘 찍었고, 뭔가 숨은 대단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런 사진들은 색상이니, 구도니 하는 것들을 잘 모르는 초보자가 볼 때도 그냥 감탄부터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유르겐 텔러의 사진들의 느낌은 너무나 다르다.
처음 사진전을 찾았을 때의 기대는 점점 사그라지어서, 이제 어떤 관점에서 사진들을 봐야하는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사실 이런 사진은 그냥 아무나 카메라만 들어도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인다.
사진 속 인물의 수영복에 적힌 글귀 - touch me가 사진전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사진은 몹시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 것 같은데..
나는 사진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도 볼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작품 설명을 하시는 분들께 사진의 의미를 여쭤보았다.
“
이번 사진전의 이름은 ‘touch me’입니다.
무척이나 친밀하고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이 문구는 바로 이 사진 속의 수영복에 적힌 문구와도 같습니다.
수영복 팬티의 전면 - 즉 성기가 있는 곳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살짝은 에로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진 자체만 보면, 유르겐 텔러의 사진은 그냥 대충 찍어 놓은 것 같습니다.
대충이라는 말에 있는 부정적인 느낌을 빼면, 그것은 무척 자유롭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미 보신 다른 사진들에서도 나타나듯, 그의 사진은 피사체 뿐 아니라 작가조차 힘을 쭉 뺀, 아주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에서는 이런 편안함과 자유분방함, 그리고 유쾌함과 섹슈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유르겐 텔러의 스타일입니다.
”
이번 사진전의 이름은 ‘touch me’입니다.
무척이나 친밀하고 감각적인 느낌을 주는 이 문구는 바로 이 사진 속의 수영복에 적힌 문구와도 같습니다.
수영복 팬티의 전면 - 즉 성기가 있는 곳에 적혀 있는 문구를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살짝은 에로틱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진 자체만 보면, 유르겐 텔러의 사진은 그냥 대충 찍어 놓은 것 같습니다.
대충이라는 말에 있는 부정적인 느낌을 빼면, 그것은 무척 자유롭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미 보신 다른 사진들에서도 나타나듯, 그의 사진은 피사체 뿐 아니라 작가조차 힘을 쭉 뺀, 아주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에서는 이런 편안함과 자유분방함, 그리고 유쾌함과 섹슈얼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유르겐 텔러의 스타일입니다.
”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문득 사진을 바라보는 나의 자세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진은 2층으로 내려와 처음 본 사진이었다.
아까 문어 사진을 보고 느꼈던 것 이상의 불쾌감을 또 느끼게 되었다.
왜 불쾌한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작가의 의도가 썩 호의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걸 보고 떠오르는 것이 있지? 그게 무엇인지 말해봐.”
그는 또 말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한번 얘기해봐, 고상한 척은 이제 그만 하는 게 어때?”
뭔가 부끄러운 과거가 까발려진 것 같은 느낌, 내가 느낀 불쾌함은 바로 그런 느낌과 닮아 있었다.
오디오 설명을 들어보니, 이 사진은 코끼리가 바나나를 먹고 있는 장면을 찍은 것이라는데 작가가 느낀 것은 ‘매우 자극적인 그것!(작가의 설명 그대로)’ 이라고 한다.
처음 이 사진을 봤을 때는 그냥 에로틱한 느낌을 강조한 사진인가보다 했다.
그냥 많이 전시되어 있는 그의 나체사진들 중 하나인가보다 하고 말이다.
하지만 사진에서 눈을 돌리려는 순간,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분명 여자의 몸인 것 같은데, 사진의 왼쪽 부분에 남성의 성기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다시 작가의 비웃음이 느껴졌다.
작가는 유쾌하게 농담을 던지는데 그걸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특히나 성(性)이라는 주제를 너무 무거운 의미로 받아들이는 탓에 지나치게 불편해 하는가보다.
작가는 자연스러운 미(美)를 보여 주고 있는데, 나는 그걸 외설이라 하며 터부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물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잠깐의 깨달음으로 확 변하고 하는 건 현실엔 없다.
나는 여전히 사진을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읽기 위해,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맨 왼쪽 사진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의자’란다.
프로이트의 성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이 사진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까?
해석하는데 좀 더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운데는 종유석인데, 마치 남근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Mariacarla(아마도 모델의 이름일까?)라는 사진이 있는데,
양초를 들고 있는 나체의 모델은 마치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이름을 딴 맨 왼쪽 사진과 나머지 사진들을 한 줄로 배열해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성이 우리 인간을 해석할 수 있는 주요 코드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보면 나의 이 강한 터부감과 죄의식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는 또 다른 기괴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왼쪽에는 바비큐를 한 흔적 같은 것이 흉하게 남아 있고 오른쪽에는 성장(盛裝)을 한 여인이 ‘곧고 바른 자세로’ 치마를 들어 성기를 드러내고 있다.
두 사진의 색상이 비슷해서일까, 아니면 자세가 비슷해서일까.
어쩐지 여인의 사진에서 바비큐 되어 뼈만 남은 모든 것이 까발려진 짐승의 사체가 겹쳐 보였다.
이 역시 결코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느낌이었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식용 고기처럼 소비재로 전락해 버린 성(性)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바비큐 된 동물의 사체가 주는 기괴함 - 그저 그 기괴한 느낌을 연출하고 있는 것일까?
이건 그냥 재떨이다.
굳이 특색을 찾는다면 눌러 끈 담배꽁초와 담뱃재가 재떨이에 지저분하게 보인다는 점 뿐.
아마도 이 사진은 옆의 바비큐와 성기를 드러낸 여인의 사진과 연작일 것 같다.
사용된 색감이며, 그 느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저분한 재떨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소비의 대상이 된 성, 그리고 그 소비의 흔적 - 거의 배설에 가까운 그 흔적에 대한 이야기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까의 그 성장을 한 여인이 창녀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상상력의 빈곤이라는 생각이 드는 해석이다.
둘 다 유명한 모델과 배우라는데, 아는 바가 없다.
검색해 보아도 딱히 알 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냥 본 느낌만 적는 게 좋겠다 싶다.
위의 사진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진을 보고 나는 성적인 느낌을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이 변태 같은 작가의 사진을 너무 많이 본 탓에 부작용이 든 걸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봐도 별 감흥이 없는 것은 왜일까?
젊은 여성의 적나라한 나체다. 좋든 싫든 어떤 반응이든 나와야 정상일 텐데, 그런 종류의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매우 건조한 느낌이 든다.
나체의 여인은 두 팔을 묶인 듯 하늘로 쳐들고 있다.
팔 다리는 프레임에서 잘려 나가서 여인의 나체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진 속 여인에게서는 전혀 현실적인 느낌을 받을 수 없다.
나체가 눈에 너무나 잘 들어오는데도, 나체를 크게 인식하지 못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째서 이런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인지, 물어 보고 싶었지만 큐레이터들이 모두 여자여서 물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지금도 나는 왜 이런 느낌을 받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래 노인 사진에 있는 과일은 자두(plum)라고 한다.
작가의 오디오 설명이 있어서 들어 보니 자두의 생명력, 그리고 어떤 기교나 보정도 없는 사진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광고 사진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후보정을 하지 않는다는데 이런 그의 작업 방식은 ‘자연스러움’을 가장 큰 가치로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매우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이었다.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찍은 연작 중 하나인데,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작가의 변태적 취향을 드러낸 - 그로테스크함이 전부인 사진인 줄 알았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나폴레옹의 대관식 사진과 함께 해석해야 한다는 큐레이터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퍼즐의 짝을 조금씩 맞춰 나가게 된 느낌이 들었다.
한때 나폴레옹에 흠뻑 빠져 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대관식 그림을 찍은 사진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또 다시 질문이 고개를 든다.
그는 왜 이런 사진을 찍었을까?
이건 그냥 벽에 걸린 그림을 찍은 것뿐인데,
더구나 밑에는 플래시의 빛이 그림 표면에 반사되어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걸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말이다.
큐레이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다.
큐레이터는 말했다.
"
나폴레옹이 직접 스스로를 왕으로 만든 것처럼,
왕관을 직접 들어 자신의 머리에 썼던 것처럼 이 작품에는 작가의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플래시의 반사된 빛을 그대로 보여 준 이유는 후보정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게 사진을 찍은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사진을 찍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
그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강변하고 있다
"
비슷한 의미로 위의 산양의 내장을 꺼내고 있는 신상 사진은 피사체 그 자체를 꺼내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작품관과 자부심이 드러나 있다고 한다.
이제는 꿈보다 해몽이네, 하는 생각보다는 과연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나는 그만큼 또 변했다.
달라졌다.
비록 완전한 변화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사진을 보면 볼수록, 나의 편협한 고정관념이 작품과 똑바로 대면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진은 이래야 한다.’ 하는 고정 관념.
‘사진전은 이래야 한다.’ 하는 고정 관념.
‘성은 아름답게, 하지만 최소한으로 묘사해야만 한다.’하는 쓸데없는 금기.
‘그림을 그대로 찍은 것은 사진이 아니다’라는 고정 관념.
‘좋은 사진은 화이트홀이 없어야 하며, 화이트밸런스도 잘 맞아야 한다.’하는 기교에 대한 맹신 등.
이런 것들에 사로잡혀 정작 사진이 가지고 있는 의미,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다.
유르겐 텔러의 사진은 이런 나의 고정관념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한 자극으로 흔들어 놓았다.
아직 온전한 깨달음이라 말하기에는 사색의 깊이와 변화의 폭이 너무 작지만 이런 경험이 나를 좀 더 확장시켜 줄 것이다.
실제로 작가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설령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고 해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진에서의 예술이란 관객의 감상도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니 말이다.
사진들을 보면서, 좀 더 가벼워지고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가벼움 속의 진지함은 무거운 긴장보다 훨씬 더 큰 감명을 준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한 고정관념은 작품을 감상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새삼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7월 말까지 한다던가?
입장료도 나름 저렴하니(오천원) 한번쯤 다녀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