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시사人Kunner

정치와 사회 - 정치의 세 차원과 현실 직시, 과연 가능한가?

Kunner 2011. 1. 16. 18:34
<사람 사는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 - 그것이 정치이다.>

아래는 계절학기 - '정치와 사회' 수업의 기말고사 대신 치른 문제제기 발표 내용이다.



이번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꼽으라면, 단연 정치의 세 차원과 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정치란 그 시대적, 공간적 현실 속에서 문제를 진단하는 과정, 처방하는 과정, 해결하는 과정을 말할 것인데 이는 각각 국가 차원의 정치, 체제 차원의 정치, 정부 차원의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정치의 세 차원>


여기서 세 차원의 정치들의 관계는 그림과 같습니다.
국가 차원의 정치가 체제 차원의 정치를 지탱하고, 체제 차원의 정치가 다시 정부 차원의 정치를 지탱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정치라 하면 정부 차원의 정치만을 떠올리기 십상인데, 이는 정치의 표층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그보다는 국가 차원의 정치와 체제 차원의 정치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차원의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한 경우, 체제 차원의 정치는 종종 정부의 힘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현실 속의 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현실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 하는 관점의 정립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를 위해 기존의 관점 - 이데올로기, 이념, 주의 등-은 어떠한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어떠한 기존의 관점도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관점이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놓인 공간적 배경 속에서 형성된 것이므로, 기존의 관점이 이 땅의 우리가 겪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잣대가 되지 못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의 관점을 분석하고, 그들이 어떤 사유 체제를 가지고 현실을 분석했는지,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봐야 하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고(국가 차원의 정치), 그 문제에 대해 처방하며(체제 차원의 정치), 그 처방 결과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정부 차원의 정치)하는데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결국 국가 차원의 정치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 어떻게 국가 차원의 정치가 체제 차원의 정치와 정부 차원의 정치를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국가 차원의 정치 - 우리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 우리가 바라는 인간다움, 올바름이 무엇인지 합의해 나가는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강의를 들으면서 줄기차게 들었던 질문은, 이러한 것들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올바름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이란 결국 소수의 엘리트들이 끌고 나가고, 절대 다수의 민중은 제시된 길을 따라야만 하는 엘리트주의적 정치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도 않고 모두가 같은 수준의 발언권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서 누군가는 이야기 하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따르기만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이뤄진 합의라는 것이 과연 모두가 참여해 나간 사회적 합의라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결국은 소수의 엘리트가 주동하는 기존의 정치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며, 현실의 부조리를 척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담론이나 사회적 합의, 국가 차원의 정치 등을 말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은 때로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주의이자 교조주의로서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유들로 인해, 과연 진정한 의미로서의 개혁이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어떠한 개혁도 결국엔 그저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주도권 싸움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정치란 올바름에 대한 것이라고, 즉 공동체가 나아갈 진정한 올바름에 대한 고찰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네 역사와 현실을 들여다보면 어쩐지 우울해집니다. ‘나의 소원’을 말하던 백범은 채 그 꿈을 펴 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갔습니다. 오히려 현실과 타협하고 타락한 기득권을 보장한 우남이 국부 소리를 듣고 있는 현실입니다. 과연 이런 현실에서 정치란 올바름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 보겠습니다.

먼저 엘리트주의에 대한 우려입니다.
어차피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소수입니다. 근대 유럽의 사상가들과 그의 사상들을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상가도 완전히 독창적인 생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시대적 조류에 따른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묶어 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5년 마다 대선에서 ‘시대정신’이라 일컬어지는 어떤 관념이 부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정신’이라는 건 과연 누가 말하는 시대정신입니까? 누구도 제게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 주위의 누구도 시대정신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도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 시대정신을 만들어 낸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발언권을 행사하는 소수 엘리트들입니다. 저는 지난 2007년의 시대정신이 ‘경제 살리기’였다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언론매체는 그 때의 ‘시대정신’이 ‘경제’였다며, ‘성장’이라든가 ‘양극화해소’라든가 하는 가만 들여다보면 서로 상충되어 결코 동시에 만족될 수 없는 가치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대정신’이란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 이슈를 누가 선점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위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는 의미는, 다시 말해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해 사회에 존재하는 많은 가치들 중 하나(기존의 것)를 꺼내 정치적 이슈로 만들어 내는 행위(새로운 것)로서 엘리트주의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예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광복을 맞아 임시정부나 만주, 미국 등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들이 하나둘씩 나라를 찾아 들어왔습니다. 이들은 각기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국가의 형태에 따라 삼삼오오 짝을 이뤘고<국가 차원의 정치>, 그들은 곧 이데올로기 집단이 되었습니다<체제 차원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함>. 이 과정에서 절대 다수의 서민들은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꼭 참여해야 옳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며, 이 단계에서는 그저 그들이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 갈 뿐입니다. 이렇게 삼삼오오 짝지어진 이데올로기 집단은 서로 대화와 타협으로 국가 차원의 정치를 펴 나간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부정하는 부정의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의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일파’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김구’와 ‘여운형’ 등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단정에서의 국가/체제/정부 차원의 정치>

둘째로 이상주의에 그칠 가능성은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국가 차원의 정치란 결국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정과 그 결과로서의 가치의 공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사회적 담론과 이를 통한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올바로 서는 것은 물론 각 개인의 사고가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도록 하는 외부적 환경, 그리고 각 개인의 의사표현이 자율적으로 표출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 분위기입니다. 이는 하버마스가 말한 소통의 기본 원리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사회적 담론을 해낼 만한 역량이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입니다. 역량이란 개인의 내재적 역량도 있겠지만, 전체 사회적 배경으로서의 역량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해방 직후에 비해 개인의 내재적 역량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러나 외재적인, 사회적 배경은 그때와 다름없거나 훨씬 더 교묘한 올가미에 씌워져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불과 100년 전 우리는 조선이었고, 그 후로 36년간의 일정, 3년간의 미군정, 그리고 48년 단정 수립 이후 5공화국 까지, 아니 사실 상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고민해서 얻은 가치의 공유가 아닌, 외부에서 강요된 것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까지 여전히 한쪽으로만 경도된 사회, ‘다름’을 말하는 것이 ‘틀림’이 되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지배하는 사회,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별종, 낙오자로 낙인찍히는 사회에서 과연 우리가 국가 차원의 담론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 국가 체제에서 가치란 결국 이익이며, 이익은 곧 사유재산을 말하고, 이 재산은 곧 기득권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서구 유럽에서 형성되어 온 기득권과 동일한 개념이라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의 부의 형성을 보노라면 친일의 결과이거나, 정부 권력의 비리의 결과, 정경유착의 결과이자 절대 다수의 희생을 담보로 한 선택받은 소수의 이익 독점 등 그 정당성에 있어 다수가 동의하기 힘든 것이 사실 아닙니까? 지금 제기하는 것은 단순히 많이 가졌다, 적게 가졌다 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가진 기득권을 가지고 또 다른 기득권을 만들고 이런 기득권들이 사회 지배 구조를 고착화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전사회적으로 무차별적으로 강요되는 신자유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자본주의체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고, 이런 기화로 기득권자들(자본가)의 지배구조는 더욱 공고화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직 모두 물질-돈으로만 귀결될 뿐 이념도, 가치도, 관념도, 사유도, 체제도 자본의 지배 대상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또한 현대 사회는 대중사회이기도 합니다. 대중매체(매스미디어)를 지배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으며, 대중매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입니다. 대중매체는 주로 대중에 획일적 가치를 주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대중매체의 이면에 자본가들이 존재하고 있는 한, 대중이 받아들이는 획일적 가치는 바로 마르크스가 말했던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속삭임은 결코 부정적이거나, 지배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몹시 달콤합니다. ‘부자 되세요(부자=善)’, ‘어려울 때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어려울 때의 유일한 친구는 돈)’, ‘자연을 사랑하세요(자연을 파괴하는 절대적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기업-기업가의 탐욕이라는 것을 호도함)’은 그 이면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의 선택을 따르는 것을 더 편안하게 느낀다고 합니다. 대중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뇌 당하는 것은 진실을 깨닫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현실을 볼 수 있는 빨간약과 현실을 눈감고 살 수 있는 파란약이 나옵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 지나치게 부정적이라 느껴질 때 우리는 빨간약을 먹는데 주저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 현실에 대한 문제를 직시하고 올바름을 향해 달려 나갈 수 있을까요? 제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러한 현실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과연 그게 가능한가 하는 점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개혁을 기존 세력-기득권에 대한 신흥 세력의 도전과 이에 대한 기존 세력의 응전이라는 관계로 볼 때, 이것을 단순화하다 보면 결국 헤게모니의 싸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국가의 건설이 그렇고, 국가 내에서도 특정 세력의 발호가 그렇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정도전의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만, 결국 그도 고려 말 신진사대부가 받았던 불평등한 대우에 대한 반감으로 기득권을 쥐기 위한 투쟁을 한 것이 아닙니까? 물론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이상을 폄하하거나 그가 내세운 국가 경영 이론에 대해 부정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에서 그와 같이 큰 기개를 품은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고 싶다는 열망과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다고 해도 그가 처한 현실이 기득권이 아닌 신진 세력에 있었고, 기득권의 기득 체제를 빼앗아 신진 세력들이 재편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당장 개혁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정도전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사찰과 기존 세력들이 가진 전답을 몰수하고 사병을 철폐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답과 사병은 공신들이 나눠 가졌습니다. 또한 많은 역사적 연구에서 조선의 인민(백성)은 고려의 인민들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과연 공동체 전체 성원이 원했던 길이었습니까? 아니면 소수의 지배자가 서로 위치만 바꾼 것입니까? 
비단 정도전과 조선의 경우만이 아닙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볼 때 거의 모든 정치적 사건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유럽의 근현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하기만 해 온 것 같은 우리 60년 헌정사도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옳다’, ‘그르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현실이 이런데 - 결국 개혁이라는 것은 전체 구성원이 나아갈 올바른 방향에 대한 모색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기득권의 재편을 위한 명분과 논리로서 작용하는 것이 현실인데, 국가 차원의 정치며 체제 차원의 정치라는 것은 결국 허상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필요하고 절실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것과 가능한 것은 다릅니다. 과연 그런 것들이 가능한가, 또 가능하다면 평화로운 방법으로도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들고 있습니다.

제가 드렸던 질문 중 ‘욕창이 난 환자’에 대한 비유는 이런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당장 욕창을 치료해야 하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하고 여쭸던 것은 현실의 부조리를 먼저 깨뜨려야만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지 않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일방적으로 치우친 사회에서 현실 직시란 이단이고, 별종이며, 사회 부적응아이거나 낙오자일 뿐일 것이기 때문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청년들이 포부도 패기도 없다고 말하며 측은한 세대니 암울한 세대니 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매스컴에 뭇매를 맞는 20대 당사자가 아닙니다만, 이러한 태도에는 몹시 분개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이 세대는 동기간의 경쟁 외에 다른 가치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1등과 꼴찌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항상 정해진 인원만이 선택받는 사회에서 자라 왔습니다. 그 외의 가치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이런 경쟁에서 한번이라도 이탈하면 다시는 사회 주류로 편입되지 못하고 낙오하고 마는 무섭고 냉엄한 현실 속에서 왜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느냐고 왜 집단이 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기만 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고스란히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 그 자체입니다. 다른 가치는 용납되지 못하고 모두가 한 방향으로만 뛰어야 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스스로 일어나 제대로 현실을 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론 몽상적이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잔인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항상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를 뒤바꾸는 일은, 과거의 많은 혁명들과 같이 피를 보는 가운데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가 기본적으로 합의해야 할 최고의 전제여야 할 것입니다. 물론,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러한 급진적 혁명이 불가피할 때도 있을 테고, 그 역시 정치의 한 방법이긴 하겠지만, 이러한 광기가(긍정적 의미로든, 부정적 의미로든) 사회를 휩쓸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정치의 본연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란 결국 사람이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한 - 올바름을 위한 이념과 관념의 체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이 심화될 때 우리는 전쟁이나 폭력, 탄압을 겪게 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 과정 중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으며, 올바르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더욱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극단적인 충돌은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4.19나 5.18, 6월 항쟁 등의 민주화 운동을 두고 폭력적 방법에 의한 급진적 사회 개혁들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그 민주화 운동들이 폭력적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운동 과정에서의 지엽적인 결과일 뿐 그 운동의 본질이 아닙니다. 전쟁이나 정부의 폭압과는 다릅니다.
정리하자면, 폭력적 방법에 의한 사회 개혁, 기득권의 재편은 가장 낮은 수준의 정치로, 우리가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득권이란 결코 자기 몫을 나누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셈법은 하나를 가지면 또 하나를 갖는 것입니다. 가치(이익-자원)는 결코 절대 다수에게 고르게 나눠지지 않습니다. 자본에 있어, 한번 쥔 손은 결코 펴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본의 논리가 현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재편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우리는 과연 힘으로 빼앗는 것 - 피를 보는 것 외 다른 방법으로 현실을 타개할 수 있을까요? 

수업이 끝난 지금에서도 생각할수록 문제는 더 깊어지고,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아쉽게도 아직 저는 저의 생각을 정립하지 못했습니다. 사고가 좀 더 확장했나 싶었는데, 어느 순간 계속 같은 쳇바퀴를 돌고 있다는 걸 깨닫는 요즘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아직 제겐 좀 더 고민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