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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 여행을 꿈꾸다
    쉼을 위한 이야기/여행 2010. 5. 8. 02:13

    긴 하루를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반갑지 않은 긴 정체 행렬을 만났다.

    밤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
    어지간하면 이 시간에 막힐 리 없는 서해안 고속도로 하행선.

    무엇 때문일까 잠시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 오늘은 금요일이다.
    주말을 맞아 다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거겠지.

    정체 행렬에 짜증이 묻어 나려다 설레는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고 있을 그들을 떠올렸다.
    비록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내겐 그저 앞 차, 옆 차로 인식될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꽉 막힌 이 정체의 시간 마저도 행복함 그 자체일 것이렸다.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음악을 끄고 라디오를 켰다.
    늘 듣던 채널이 아닌 다른 채널로 다이얼을 돌린다.
    딱딱한 목소리로 전하는 뉴스가 아니라, 사람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평소에는 전혀 없던 일,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라디오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내가 좋아할만한 노래는 나오지 않는다.
    온통 시끄럽거나, 유치하거나.
    그렇게 주파수를 돌리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나는 갑자기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하루나 이틀 다녀 오는 것이 아닌.. 좀 오래.
    그래, 한달 쯤 다녀 왔으면 좋겠다.

    유럽이었으면 좋겠다, 하던 생각이 어느 덧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푸른 지중해를 떠올리게 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눈처럼 흰 백사장이 펼쳐진 곳.
    나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를 유유히 걷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지만, 그야말로 적막한 곳.
    시간의 흐름마저 멈춘 듯 고요한 곳.
    그래.. 나는 또 다시 탈출을 꿈 꾸고 있다.


    그러다 문득, 언젠가 봤던 영화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언제나 가방 속에 프랑스 비자를 품고 다니는 사람.
    언제고 한번은 파리에 갈 거라던 사람.
    그리고 그 언제나처럼 이어지는 바람으로 힘겨운 하루 하루를 버티는 사람.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봤던 그 영화를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듯 하다.
    그리고 그때보다 두배는 나이를 먹은 지금,
    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아냥대던 그 일을 하고 싶어졌다.
    꼭 프랑스가 아니어도 좋아.
    이탈리아여도 좋고, 독일이어도 좋다.
    헝가리여도 좋고, 체코여도 좋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토리니가 있는 그리스도 좋고, 이국적 풍미가 물씬한 터키도 좋다.
    태양이 작렬하는 이베리아 반도도 좋고, 설국 러시아도 좋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정신없이 유럽 여행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한다.
    어딜 가면 좋을지, 어떤 방법이 좋을지.
    예상 비용은 얼마며 뭘 준비해야 하는지.

    어차피 지구 반대편이다.
    3박 4일 따위는 될 일이 아니야.
    비행기 타고 날아가는 시간은 무시한다 쳐도,
    왕복 비행기 티켓만 백만원이 넘는 판에 고작 며칠 있으려고 그 돈을 쓸 수는 없겠지.
    그럼 최소한 보름.
    아.. 역시 한달이 좋겠어.
    그 이상도 좋긴 하겠지만, 다시 돌아와야 할 곳이 있으니 너무 오래는 아니어야겠지.

    나는 제멋대로인 사람.
    패키지 여행 따위는 취향이 아니다.
    영어는 물론,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등.. 제대로 할 줄 아는 외국어가 하나도 없지만 여행은 무조건 자유여행이어야 한다.
    부다페스트도 가보고 싶고, 프라하도 가보고 싶다.
    언젠가 나는 동유럽은 관심 없노라 말했었는데, 모르는 것과 관심 없는 것은 대체로 하나로 통하는 법인가보다.
    나는 동유럽에 관심이 없는게 아니라, 동유럽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말하는 게 옳았다.
    나의 섣부르고 성급한 입 방정을 또 한번 반성한다.
    뭐 여튼.. 그렇게 여기 저기 가고 싶은 내게는 자동차 여행이 제격일 것 같다.
    소형차 한 달 리스 하는데 보험 포함 200 만원 정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경도 넘고 할테니 하루에 5백 킬로미터 씩 달린다 치고 한달이면 15,000 킬로미터다.
    리스 대상 차량의 연비는 20km/l, 유럽의 디젤 가격은 리터 당 2천원 정도 한다니까 하루 25리터 = 5만원 정도 든다.
    역시 한 달이면 150 만원.
    먹고 자는데 한 달 쓰면 100 만원쯤 들려나?
    차가 있으니 노숙 걱정은 없을게다.
    그럼 왕복 항공료에 + 알파 까지 하면... 음, 계산은 나중에 하자.

    마음은 벌써 경찰청에 가서 국제 면허증을 발급 받고 있다.
    어차피 적성검사 유효기간이 끝나서 올해 안에 면허증 갱신해야 한다.
    갱신 하면서 국제 면허증을 발부 받으리라 마음 먹는데, 국제 면허증의 유효 기간이 1년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체 못 하던 마음에 급 브레이크가 걸린다.
    국제 면혀증의 유효기간이 있다는 말에 나는 갑자기 찬란한 환상에서 냉엄한 현실로 추락해 버렸다.


    나는 직장인이다.
    그리고 나는 대학생이다.
    둘 중 하나만 했었더라도, 아마 그렇게 허무맹랑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둘 다 해내야 하는 내게 유럽여행, 그것도 한 달 짜리 유럽여행은 그야말로 허무맹랑한 꿈일 뿐이다.
    거기에 1년 내 라는 제한은 더욱 큰 장벽을 만들고 있다.

    복지 제도가 잘 된 회사를 다니면, 재충전 하라고 해외여행도 보내 주고 휴가기간도 한달씩 되고 한다더라.
    하지만 나는 그런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설령 휴가를 준다 해도 돈이 없어 못 갈 형편이다.
    게다가 회사의 상황은 여름 휴가조차 맘 놓고 쓸 수 없도록 만든다.
    좀 큰 프로젝트를 맡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팀원들 노고를 치하하면서 한 달 씩 휴가를 갔다 오는 공상에 잠겨 본다.
    부질 없다.
    박박 문질러 지워 버렸다. 머릿속에 큰 스크래치가 남아 버릴 정도로...

    그래도 나는 가고 싶다.
    언제가 좋을까.
    당장 올해는 어려울거야.
    돈도 없는데다 시간은 더 없지.
    올해 안이라봐야 이제 6개월 밖에 남지 않았잖는가.

    그럼 내년이다.
    내년 여름이야.
    아니.. 가만 생각하니 내년 여름보다는 겨울이 좋겠다.
    내년 겨울이면 마지막 학기를 끝내는 시점이 된다.
    졸업과 동시에 떠난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냥 흐뭇하다.
    더구나 다음 학기 등록금에 대한 걱정도 없으니, 한 학기 등록금 냈다 치고 다녀 올 만도 하겠지.
    조금 더 들려나...


    어렸을 적부터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꼽곤 했다.
    나폴레옹의 나라, 혁명의 나라, 박애 - 관용의 나라.
    그리고 로마 -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지금은 산토리니에 부다페스트, 프라하, 바르셀로나, 말라가가 뒤죽박죽 얽혀 있어서 도무지 동선을 어떻게 짜야 할지조차 모르겠지만..

    나는 간다.

    2011년 12월 19일. D-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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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유럽과는 전혀 관계 없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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